옥스퍼드 신성회(holy club)는 도심 속의 수도원과 같았다. 옥스퍼드 신성회가 엄수했던 규칙의 일부이다. 

“매일 영적 일기를 쓰며, 한 주간에 하루는 편지를 썼다. 영국 국교회의 모든 공중예배와 기도회에 반드시 참여했다. 매주일과 모든 가능한 기회에 성만찬을 받았다. 영국 국교회의 모든 법과 규칙을 지켰다. 매일 9시, 12시, 15시, 18시에 매일의 기도(collects)를 드렸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되, 오후 3시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매일 한 시간씩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신앙생활에 관하여 권면했다.” “모든 대화에서 논쟁을 피하고 성결의 증진과 성결의 실천을 위한 실제적이고 유익한 대화만 했다. 모임마다 대화의 주제를 미리 정하고 계획했다. 중보기도를 하되, 주일에는 동료들을 위하여, 월요일에는 학생들을 위하여,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매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였다.” (김진두. 『존 웨슬리의 생애』. 94쪽).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보다 더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옥스퍼드 신성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했다. 특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하신 예수의 말씀을 살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특심이었다. 바카도 감옥(월, 금), 캇슬 감옥(화, 목, 토), 가난한 어린이들(수), 가난한 사람들과 외로운 노인들(주일). 한주간의 일정표에 포함된 정기적인 나눔과 돌봄 사역이었다. 이러한 사역에는 많은 지출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신성회원들은 “수입 중에서 자신의 필수적인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었다. 가능한 많이 주는 생활은 옥스퍼드 메소디스트들이 평생토록 지킨 규칙이었다.” 이것은 후에 “가능한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고, 가능한 많이 주라”는 메소디스트의 규칙으로 발전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삶은 옥스퍼드 신성회가 온갖 경멸과 조롱 그리고 핍박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규칙적이며 금욕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노는 물이 다르고, 눈에 보이지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신성회의 길이 껄끄럽고 불편했던 것이다. 

윌리엄 몰간의 죽음도 그 중 하나였다. 몰간은 신성회의 초기 태동과 발전에 함께한 인물이었다. 1731년 8월, 그가 오랫동안 앓아왔던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질병 악화와 죽음의 책임을 신성회와 존 웨슬리에게 돌렸다. 아들의 질병이 지나친 규율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 때문에 질병이 악화되었고, 지나친 금욕생활 강요 때문에 아들이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몰간의 부친에게 신성회와 자신을 변호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이 문제가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몰간의 죽음이 신성회의 지나친 금욕생활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신성회의 명예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해에 존 웨슬리는 한 가지 일로 큰 위로를 얻었다. 몰간의 부친이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간 자신의 둘째 아들을 존 웨슬리에게 맡긴 것이다.

존 웨슬리는 동성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동성연애를 하다가 감옥에 갇힌 블레어라는 죄수를 도우려고 여러 번 만난 것이 오해의 계기였다. 존 웨슬리가 감옥의 죄수들을 돕는 것은 이전부터 계속해 온 일이었다. 이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신성회를 더 나쁘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존 웨슬리가 젊은 날 마주했던 세상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횡행하고,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영혼을 지켜내고자 찾은 길은 ‘규칙’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