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연합해서 큰 집회를 연다. 차별금지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핵심은 동성애 관련 이슈일 것이다.
교회는 왜 이토록 동성애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가. 소돔과 고모라라는, 동성애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대단히 강력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심판하시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근거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나 공정하지 못한 재판 등이다.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각 교단 차원이든 연합해서든 목소리를 낸 경우가 있었나 싶다. 신앙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낼 수는 있겠지만 이정도까지 해야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다.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고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는 자는 간음한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두 가지에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다–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는 그렇지 않다. 동성애가 다른 죄와 구별되는 부분은 그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충동이 없다-아마도 그렇지 않을까-는 점이라고 본다. 그 문제에 대해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차별금지법이 교회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의 제도 때문에 힘을 잃은 역사는 없다. 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오히려 세상의 힘을 가졌을 때였다.
기독교는 그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시대적 지리적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불법이었다. 법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고, 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지만 교회는 오히려 부흥했고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그렇게 제국의 종교가 되어 세상의 힘과 제도를 사용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자 능력을 잃었다. 세상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된다.
교회를 위축시키는 것은 세상의 제도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다. 신앙의 싸움은 외적 차원이 아니라 내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지 못해서 한국 교회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현실을 겪고 있나. 거룩함과 구별됨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세상과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차별금지법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한국 교회는 왜 소멸-청소년 기독교인 비율을 본다면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나. 이른바 ‘확산되는 동성애’로 인해 자녀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인가. 그들에게 신앙을 전수해 주어야 할 부모 세대가 교회 가서는 그럴싸한 모습으로 예배하면서 정작 삶의 자리에선 아파트값에 목매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최고의 가치는 돈이구나’ 하는 가치관을 체화시켜 주었기 때문 아닌가.
인본주의를 그토록 경계하며 신본주의로 살아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왜 자본주의에는 아무런 경계심을 느끼지 못하는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단순한 진리를 긴 부연설명으로 합리화하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극대화시키는 사회구조와 법과 제도는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면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 아닌가.
27일에 개최될 집회를 통해 교회가 세상의 힘-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다수’라는-을 과시하고, 그렇게 해서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과연 그것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중세 교회의 실패를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교회의 다름은 방법이 아니라 목표에 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목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하고 이룬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세상은 알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우리가 진리라 믿고 고백하는 성경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