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할 지가 정해졌다면 어떻게 말할 지를 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말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화젯거리가 던져지면 뜸들이지 않고 거침없이 사람의 귀를 사로잡으며 말을 할 것이다. 간혹 주변에 이런 사람을 보기도 하지만 이런 재주를 가진 이는 극히 드물다. 화젯거리가 노변한담(爐邊閑談)에 오르는 얘깃거리정도라면 모르겠으나 인간의 실존적 연약함과 전능자의 불가해한 은혜에 관한 말씀이라면 그렇게 즉문즉답식으로 말할 재주를 가진 이는 더더욱 찾기 어려울 것이다. 더하여 그런 재주를 가진 이라도 재주만 믿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하다보면 실수할 가능성도 크다. 그러므로 신실한 설교자는 차분하게 자신이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작성한 설교주제문을 묵상하며 이를 어떻게 조리있게 풀어낼지를 숙고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설교 주제를 정했다면 설교 구성 방식을 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설교할 지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자신이 준비한 설교 주제를 전하려고 하느냐이다. 설교학자들은 이를 설교에서 형식(Form)과 기능(Function)의 관계라고 설명한다. 어떤 설교 형식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그 설교가 어떤 기능을 할 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선포할 것인지,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설득할 것인지 등 설교가 무슨 일을 할지 그 기능 혹은 목적을 정하면 그러한 설교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교 주제 혹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설교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선포하려 한다면 본문으로부터 발견한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청중의 상황에 적용하는 선형적 구조의 청교도식 설교가 어울릴 것이다.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설득하려면 대지설교가, 본문을 한 절씩 풀이한다면 절별강해설교가, 예상되는 생각을 반박하고 교정 혹은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면 정반합(正反合) 설교가 적절할 것이다. 귀납적 설교는 청중을 무장해제시키고 뜻밖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설교이고, 내러티브 설교는 내러티브로 지어진 본문의 세계를 이야기구조로 재현함으로써 청중과 함께 말씀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 안에 숨겨진 보화와 같은 진리를 발견하는 설교이며, 네페이지 설교는 죄와 은혜의 이중 구조를 이미지와 설명 혹은 논설이 결합된 네 개의 페이지로 전개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로 인한 연약함과 그러한 인간을 여전히 품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데 매우 좋은 설교 형식이다.
흑인설교자들은 성경 속 사람들이 자신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와 유사한 문제를 겪었으며 그 절망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현재적 사건으로 경축하며 노래했는데, 설교학자들은 이를 경축설교(celebration preaching)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 형식은 아이들이 찰흙놀이할 때 모양을 찍어내는 틀이라기 보다는 공구함에 채워넣은 다양한 공구들과 같다. 설교 형식 자체가 특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기능을 잘 이해할 때에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
평생 3대지 설교만 하는 목사님에게 왜 늘 3대지 설교만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익숙하고 편해서”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형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편하고 좋은 대로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설교 형식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머리에 일자(-) 홈이 파여 있는 나사를 돌리려면 십자(+)드라이버가 아닌 일자(-)드라이버가 필요하듯이 설교가 해야 할 일에 따라서 적절한 설교형식이 있는 것이다.
능숙한 일꾼이 필요에 따라 공구들을 적절하게 골라서 일하는 것처럼 설교자도 설교의 목적과 기능에 따라 적절하게 설교 형식을 골라서 설교해야 한다.
익숙하고 편해서 한 가지 설교 형식만 고집하다보면 어느새 늘 그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늘 듣는 회중도 그 한 가지 틀로 찍어내는 편협한 사고에 갇히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