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자신의 복음적 체험, 곧 성서적 구원의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성서와 동떨어진 믿음의 길, 곧 이신론에 바탕을 둔 도덕 종교를 강조하고 있었고, 존 웨슬리 또한 그 길을 충실히 신봉했다. 특히 1725년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이후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와 같은 추구는 1729년부터 그가 지도하기 시작한 신성회(Holy club)의 활동에 잘 드러나고 있다. 옥스퍼드 신성회는 존의 동생 찰스 웨슬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관용령(1689) 이후 영국 국교회 내에 친밀한 영적 교제를 지향하는 종교 단체(religious society)들이 생겨났다. ‘신앙의 다원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성회도 이러한 종교단체들 중 하나였다. 

옥스퍼드 신성회는 존 웨슬리의 지도 아래서 건강하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경건훈련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후에 위대한 메소디스트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처음에 옥스퍼드 신성회는 3~4명으로 출발하였으나 1735년에는 약 40명에 이르게 되었다. 

옥스퍼드 신성회는 처음에 독서와 토론 모임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매주 3~4회 저녁에 모여 고전을 읽고, 주일에는 신학을 읽으며 학문과 경건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독서 목적은 학문의 발전과 경건의 증진에 있었다. 그들은 주로 중세의 신비주의자들, 종교개혁시대와 당시 경건한 사람들의 작품을 읽었다. 

또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을 금식일로 정하여 금식과 절식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은 규칙적인 금식은 옥스퍼드 메소디스트들의 거룩한 습관이 되었으며 후에 모든 메소디스트의 실천이 되었다. 그리고 신성회의 기도는 주로 자기 성찰에 집중하였다. 옥스퍼드 메소디스트들은 ‘마음과 생활의 성결’,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결을 얻기 위하여 ‘함께 모이고 서로의 영혼을 책임지고 서로 감독하고 돌보고 권면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일을 위해 그들은 규칙을 만들고 정해진 규칙을 엄격히 지켰다. 

옥스퍼드 신성회는 감옥의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여 전도하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돕는 일도 하였다. 당시 감옥생활은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참했으며 많은 죄수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신성회는 죄수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으며, 추운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어서 따뜻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신성회는 옥스퍼드와 주변 지역에 있는 병자들을 방문하여 돌보는 일도 했다. 이 일은 구빈원(poor house) 사역으로 발전했다. 구빈원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살면서 노동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한번 구빈원에 들어가면 영원히 그곳에서 죽는 절망적인 신세가 되었다. 신성회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 전도자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돕는 자선 활동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교육 사업도 시작했다. 

이런 헌신적인 자선과 박애활동 때문에 신성회는 심한 비판과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신성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메소디스트가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초대교회를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존 웨슬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는 선을 행해야 하는데, 가난한 자들을 돕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병자들을 고치고 갇힌 자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의 것들이 1725년의 변화 이후, 존 웨슬리가 추구하고 걸었던 길이었다. 하지만 “1725년의 변화는 신앙적인 변화가 없는 하나의 단순한 도적적인 결심”에 지나지 않았다. 곧 “자력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의 다짐이었을 뿐 자기의 구원문제에 대한 이해나 십자가 대속의 의미에 대하여 아무런 변화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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