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처치대학은 옥스퍼드대학교의 가장 크고 중요한 대학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직자, 신학자, 정치가, 문학가, 철학가들을 비롯해 최상위층의 지도자들은 대다수 이곳 출신이었다.
존 웨슬리는 이곳에서 15년(1720-1735)을 보냈다. 청춘의 때를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그가 성직 임명(1725)을 받은 곳도, 링컨 대학의 펠로우(연구교수)로 임명(1926)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다. Holy Club(1729)을 시작한 곳도, 조지아 선교(1935)를 결심한 곳도 이곳이었다.
존 웨슬리는 5년 동안 줄곧 최고 학점을 받은 우수한 학생이었다. 경건과 도덕성에서도 모범생이었다.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에는 청교도적인 영성을 가졌던 어머니 수잔나의 영향이 컸고, 아버지 사무엘은 학문과 독서지도에 더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하였으며, 특별히 초대 교부들의 책을 많이 정독하라고 조언했다. 아버지의 독서지도는 그의 학문 세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 또는 ‘성경 좀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성경을 깊이 읽었을 뿐 아니라, 신학을 비롯해 각종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독서를 즐겼다.
하지만 존 웨슬리의 대학생활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큰 고통이 있었다. 건강과 가난의 문제였다. 경건하면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존 웨슬리는 종교적으로 고뇌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활기찼고 명랑했으며 자신의 학업과 생활에 성실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건강의 문제로 종종 어려움을 당했다. 그는 몸이 대나무처럼 깡마르고 허약했으며 자주 코피를 흘렸다. 또 그는 폐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증과 두려움에 시달릴만큼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건강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 중 하나가 체이니(Cheyne) 박사의 건강과 장수 라는 책으로, 어머니에게 자세히 소개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체이니 박사의 조언을 따라 식이요법을 하며 운동을 충분히 하였다. 소금이 많은 음식을 피했으며 물을 충분히 마셨고, 고기도 아주 조금씩만 먹고 대신 채소를 많이 먹었다. 이를 통해 그는 한동안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꽤 오랫동안 건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770년 6월 28일자 일기에서, 그는 자신의 병력과 건강 상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 27세 되던 해 피를 토하기 시작하더니 수년간 계속 앓았다. 그 후로 열병에 걸려 죽을 뻔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전보다 더욱 건강하게 되었다. 다시 11년이 지난 후 다시 한 번 세번째 큰 고통에 시달렸고, 석달이 지나자 이것도 하나님이 고쳐주셨다. 그후로 어디 아프거나 좋지 않은 곳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현재로선 40년 전보다 더욱 건강하다. 하나님의 은혜로다!”
가난의 문제 또한 존 웨슬리를 힘들게 했다. 그는 늘 빚에 쪼들리며 살았다. 학교장학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자주 돈을 빌렸다. 누이들에게 자신은 우표 살 돈도 없어서 자주 편지를 못하니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대신 자주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데 존 웨슬리의 부모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사례비를 적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사무엘은 처음 부교역자 사례비로 28파운드를 받았고, 사우스 옴스비에서는 담임교역자 사례비로 50파운드를 받았다. 엡웨스에서는 사례비가 200파운에 달했다. 그런데 “일년에 20파운도도 못받는 목회자들이 수백명이나 되었으며, 50파운드 이하를 받는 목회자들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았던 사례비의 액수였다. 50년이 지난 후 존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일년에 15파운드씩 지급했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부모가 받았던 사례비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버지 사무엘의 강한 출세욕과 그에 따른 지출이 가난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