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쳐 고통 받고 있는 순간에도
주는 찾아다니며 어루만지고 계신다
요즘 환대라는 단어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겪게 된 소외감,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 또한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환대로 가득 찬 책입니다. 죄 때문에 죽게 된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고 회복해 주시며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환대가 그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환대의 극치는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희생하게 만드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환대가 없었더라면, 이 땅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대강령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이란, 우리에게 환대를 베풀어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환대를 매번 경험하고 그 은혜를 간직하며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않고 동행하며 예배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한 환대를 세상의 사람들에게 베풀며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많이 있겠지만, 환대를 베푸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환대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환대를 베풀어야 할까요?
하늘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환대는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이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도 선행을 배풀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환대라고 표현하지 않고 교제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지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환대하시어 살리시고 먹이시며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환대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동일하게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일지라도 조건 없이 환대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시편 147편을 보면, 포로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환대를 기대하고 노래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장의 배경은, 느헤미야 선지자 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구축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료하심을 기대하고 노래한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70년간 고난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상처입고 터지고 쓰러져있는 상태이지만,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환대를 기대하며 또 경험하며 이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깊게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상한 자를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7월에 아르헨티나의 남미 연합신학교에서 2주간 집중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자비량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에서 출국하기 이틀 전, 선교사님들과 테니스를 치다가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습니다. 처음에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왜 이곳까지 와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이렇게 다쳐야 하는가’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저녁에 의사 한 분이 선교사님의 부름에 즉시 달려와 주셨습니다. 쉬는 날이었지만,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급한 치료를 해 주시고 치료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도 그리스도인이셨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신 것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의사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목사의 본분을 지키고 있는 자인가? 그때 내면에서 시편 147편을 가지고 만든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비 준비하시니’라는 찬양입니다. 그 찬양 가사에서 “상한 자를 고치시고”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병원을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뼈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르헨티나의 병원이 내국인이나, 외국인에게도 무료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저를 데리고 가셨던 선교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 아르헨티나가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오르고 치안도 불안하고 참 살기 어렵지만, 망하지 않는 이유는 아프고 고통받는 자들을 무료로 고쳐주는 병원의 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환대의 행위로서 ‘상한 자를 고치시는 일’과 ‘아르헨티나 병원의 환대’를요!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고 어떻게 이웃을 환대해야 하는지 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