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40여년 가깝게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임하니 내가 가 보아야 할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몇몇 친구들과 등산회를 만들고 우리나라의 이산, 저산을 다니다 보니 산행일지가 100회가 훨씬 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가 보아야 할 가까운 이웃을 찾아보지 못했기에 저를 길러 주시고 신앙의 길잡이가 되어 주셨던 목사님, 장로님들, 권사님들도 뵙기도 했다.

약 3년 전 열심 있는 교회 권사님이 거리와 골목에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을 떼를 지어 데려오셔서 예배당을 메꾸었다. 그러다가 몇 주간 연락이 없어 집을 찾기로 하였다. 무더운 여름 집 전화번호를 가지고 대신동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장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손 노인을 찾아 달라고 했더니 난색을 표하면서 여기저기 연락하고 나서야 따라 오라고 하기에 그를 따라 나섰다.

큰 길을 지나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무당집, 점쟁이집들이 즐비해 있었다.  대구에 꽤 오래 살았고 재직(당시 전화국장)해 있을 때 이 지역 구석구석에 전화선 정비 상태를 점검하고 다니긴 했지만 무당, 점쟁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많은 무당, 점쟁이들이 눈에 띄게 되었는지.

파출소장이 찾아준 곳은 여인숙, 그 안에는 쪽방으로 붙어 있었다. 집을 본 순간 이곳을 자주 찾아야 하겠구나 싶었다. 근데 정작 손 노인은 누워 있다가 달성 공원에 나갔다고 했다. 거기에 가야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했다. 하는수 없이 내일 온다는 약속 시간을 알려 놓았다.

다음 날 찾아갔다. 손 노인은 반갑게 맞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잘못 살아온 지난 날들을 이야기하면서 집안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칠곡군 동명면에서 살았는데, 동생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고 살던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말, 아들, 딸도 있다고 했고, 동생들 농사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해했다. 한때는 공사현장에서 열심히 일도 했고, 돈도 모았는데 다 털려 버리고, 자녀들에게 못할 짓도 했다며 도저히 믿기 어려운 지난 날들을 들려주었다.

며칠 후 어느 친구와 같이 점심 때 곰탕을 먹으려니 그 쪽방 손 노인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정성들여 곰탕을 싸가지고 찾아갔다. “장로님 저는 장이 나빠 먹을 수 없습니다.” 나는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간 그 노인의 병세도 모르고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모르고 혼자 스스로 노인을 보살핀다고 하면서 그 형편도 모르면서 가슴 깊은 곳으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 배 장로야! 네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너도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여라(엡 5:15)라고 경고해 왔다.

그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을 들어주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동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화를 했더니 성의는 감사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언어로 보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6월 어느 날 내 차로 손 노인의 고향을 찾았다. 칠곡군 동명면 깊은 산골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손 노인의 고향, 아직 벼도 못 심었네, 저기 저 골짜기 물은 참 좋은데, 저곳도 변했네, 저 등선 넘어 아버지 산소가 있는데….

며칠 후 손 노인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연락이 없다. 혹시나 싶어 찾아 갔더니 옆방 사람이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바로 달려갔다. 의사는 말기 장암이 되어 2~3일 후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친 동생 두 명이 찾아왔다. 인사를 했는데 달갑지 않은 표시다. 이런저런 그간 손 영감을 알게 된 점, 그간 정다웠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도저히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마을에 사는 농협장하고는 친구이구요, 왜관우체국, 전화국장을 몇 년 하면서 선생님 동네도 다녀 보았습니다.” “저희들은 형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자기 자식을 버리고 형제도 모르고 심지어 형수가 돌아가셔서 자식이 그렇게도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은 분인데”라고 하면서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담임목사님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저 영감이 세상을 떠나면 저 영혼은, 저 영혼은? 나도 모르게 무릎이 꿇어졌다. 주님 저 손 노인의 영혼만이라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형제들과 의논하고 본인은 예수를 영접하기를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세례를 베풀기로 했다.  저 손 노인의 어려움을 나누고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 내 몫의 십자가라고 느끼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혼자 속삭이고 있었다.

수술하기 전 세례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 생애 그간 많은 세례 예식에 참여했고 진중 세례도 했지만 손 노인을 두고 세례 예식을 베풀 때만큼 감격스러움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세례구나. 세례의식의 중요성, 필요성 등을 깊이 인지한 순간이었다. 다음 날 수술이 끝나고 얼마 후 대구 의료원으로 옮겨졌다. 간호하던 딸을 만났다. “교회에서 왔습니다.”, “우린 교회 몰라요, 불도(佛徒)인걸요.” 싸늘하다 말고 차디차다. “아버지 친구 됩니다.”, “친구라구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머리만 숙이고 있었다. 손 영감은 눈을 뜨지도 못하면서 나를 찾았다. 손을 꼭 잡았다. 약한 음성으로 아멘, 아멘, 할렐루야를 외친다. 손 노인은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교우들 몇 분이 함께 장례에 협조했다. 화장터에서 그 관을 불속에 넣을 때까지 혼자 중얼거렸다. ‘죽음, 그 마지막 축복 있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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