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서구 교회들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변화의 지표들이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신앙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교회의 성장은 둔화되고 아예 신앙을 포기한 상태로 세상을 향하여 조용히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수많은 교회가 폐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내가 병으로 쓰러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배움은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삶의 종착점에 선 죽음의 순간에야 삶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생각의 바탕이 인간의 기준이 되고 가치가 된다. 또한 사람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생각만큼 늙는다. 생각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모든 일은 내 안에서 내 생각으로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반드시 내 밖에서 일어난다. 문제는 궁극적 생각과 세속적 생각,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은 행복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졌다. 비록 동화처럼 완벽한 삶은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가득 채우는 진솔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삶이 무엇인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이루어 가는 완성은 유한한 죽음이다.
사실 참된 인간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걸 초월해서 생각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인간은 신앙 없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과학적이며 생물학적 존재 이상으로 영원한 하나님께 열린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고난, 이별의 한계상황을 만날 때 영원의 관점 곧 궁극적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궁극적이라는 뜻의 의미는 ‘더할 나위 없는 지경에 도달하는’ 이란 뜻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이란 하나님의 관심으로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이고 총체적이며 무한한 것이라고 했다. 무조건적인 것은 상황과 조건에 상관 없이 제약받지 않으며 총체적이란 육과 영의 삶 전체를 말하고 무한적이란 무한히 계속되며 지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궁극적 관심은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유한한 세속적 가치인 목표를 부나 명예, 권력이나 장수에 두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을 자신이 스스로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며 곧 신앙이다. 영원한 진리는 하나님의 관심으로 전도서 3장 11절은 “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느니라”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3장 11절에서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특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이후 종교의 자리가 기초부터 흔들리고 이성과 합리적 지식이 진리의 근거로 예수의 부활과 기적은 부정되고 언젠가는 소멸할 것으로 보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이성과 과학적 사고를 뛰어넘어 궁극적 관심을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 복음에서 떠난 무조건 긍정의 한계와 스스로 메뚜기로 전락하는 굽은 생각과 육신의 생각도 버려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는 관심으로 변하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