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둔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불의로 밭을 갈고 죄악의 씨앗을 뿌렸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명직 목사의 마음은 죄의 유혹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그의 걸음도 위태위태했다. 

1920년 겨울, 어둠의 세력에게 황금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이명직 목사가 충남지방교회의 집회 초청을 받았다. 그때 어떤 여전도사와 동행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시절, 여성에 대한 접근성을 배려한 미덕이었다. 이명직 목사는 그녀의 형편을 잘 알았고, 그래서 그녀를 동정해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로서의 자세나 예의에서 벗어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 달에 걸쳐 함께 여행하게 되면서, 동정이 육정으로 변했다. 자유의 향연을 위해 거추장스런 예의를 벗어버렸고, 다른 사람의 이목도 꺼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의심도 살 만했다. 하지만 성령의 탄식과 경고가 그의 마음 한켠을 두드렸다. 그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그때에 그렇게 하면 덕이 되지 않고, 명예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염려하면서도 눈뜨고 우물에 빠지는 사람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행동에 빠지지 아니한 것은 차라리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형제가 이명직 목사의 중심을 일깨워 주었다. 회개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결심했다. “내가 지금 이후로는 남녀교제를 삼갈 것이다. 내가 실수하였다.” 다시는 그러한 부주의와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顚末)을 길보른 감독에게 전부 자백했다. 이 일로, 이명직 목사는 마귀의 비방과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악평을 당연한 대가로 여기며, 그럭저럭 1년을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령의 각성을 기다리고 계셨다.

1921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때 이명직 목사가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자신의 무력함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고, 학생들의 사명도 마음에 들어왔다. 생각이 단순해졌고, 짐의 무거움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마음의 범죄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추악함과 더러움보다 심령에 있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행동은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나 심령의 죄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마 5:28). 주님은 숨겨놓은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다. 비로소 그는 “성결치 못한 것도 알게 되었으며, 능력이 없는 것도, 부족한 것도 알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오직 성결을 시험해야 하겠다” 결심하고,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갔다. 골방문을 닫아 걸고 주님을 붙잡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오직 이 성결의 은혜에만 집중했다. “나에게 성결의 은혜를 주시든지, 사명을 거두어 가시든지 하옵소서. 나는 주의 뜻을 이루는 교역자가 되길 원할 뿐입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활(死活)이 걸린 것처럼 붙잡고 늘어졌다. 하루 밤을 지새우고 또 하루 밤을 지새워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음을 믿고 사흘째 밤에도 계속하여 기도했다. 어느 순간 홀연히 주의 음성이 임하였다. 주의 거룩하심도 보게 되었다. 한참 동안 혼자서 울고 웃고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술취한 사람 아니면 미친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타락한 후 처음 맛보았던 신령한 체험이었다. 이명직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그 순간의 성령의 역사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나는 그때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능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이 성결의 은혜를 학생들과 나누고, 이 은혜를 갈망하는 학생들과 함께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그곳에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났고, 성서학원을 짓누르던 어둠의 그림자가 걷히는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다. 나아가 부흥의 불길이 교단적으로 파급되어, 1920년대의 성결교회가 “라이징 스타”(Rising Star)가 되는 부흥과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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