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는 영적 침체의 두 번째 원인이 복음적 사회참여가 아니라 세속적 사회참여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진심이 아니라 시류에 영합한 위장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에 침탈된 주권회복을 위해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가 참여했다. 태동부터 풀뿌리 민중에 이르는 저변의 확대까지 교회가 주도했다. 비폭력·무저항의 평화운동이 그 기치(旗幟)로 내걸렸고, 일본 제국주의의 불의와 강탈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 민주와 겨레의 생득권을 되찾으려는 강력한 저항운동의 성격을 내포했다. 이때의 민심(民心)은 복음에 대한 설명보다 애국애족의 사상 발표나 고취를 환영했다.
이명직 목사는 이런 대중의 기호(嗜好)를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치 애국심이 대단한 것처럼 시류(時流)의 파도를 즐기고자 했다. 그래서 강단에서 피 끓는 듯한 열변으로 토해내는 그의 설교에는 복음에 대한 설명이 일말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가 봐도 그는 사상가·애국자·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환호해 주었고, 이명직도 그것을 좋게 생각했다.
사람의 기분에 맞추고자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때를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로 규정하고 이렇게 회상했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사람의 뜻에 맞추고자 하는 행위가 어찌 한두 번에 그쳤겠는가? 내가 이러는 동안에 주께서 내게 부탁하신 영혼을 몇 천명이나 지옥으로 인도했겠는가? 이러한 생각이 들 때면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고 심신이 어지러워지며 아찔해진다. 내가 참으로 진리의 복음을 부르짖었다면 몇 천명의 구원받은 자가 생겼을 것을…”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다. 그러나 빛과 소금의 복음을 배제한 사회참여의 진면목을 잊지 않아야 한다.
3·1운동 이후 한국 사회와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그간 금지되었던 각종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막혔던 봇물 터지듯이 국내로 밀려 들어왔다.
신학의 영역에서도 이성주의의 매력에 흠뻑 취한 자들에 의해 초자연적인 실체를 부정하는 사상이 삐죽빼죽 고개를 내밀더니, 그간 한국교회의 풀뿌리 신앙을 형성했던 성서 중심의 소박한 신앙을 ‘구식의 것’으로 치부하며 빈정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혼란과 혼돈 그리고 공포의 시대였다. 이때는 아마도 한국 그리스도인의 멘탈이 크게 흔들렸던 시기 중 하나일 것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촉발된 공허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변화의 홍수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변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포자기 하듯이 떠내려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명직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의문시 되었고, 영혼의 존재 또한 확신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훗날 그는 이렇게 절규했다. “아! 나는 마귀의 체면술에 걸려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었으나 실상은 죽은 자였다.”
이명직 목사는 한국교회의 엄격한 성윤리를 과거의 진부한 풍습으로 여길 정도였다. 영적 퇴행의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남녀교제의 불근신(不謹慎)” 이것이 이명직 목사가 겪은 영적 침체의 세 번째 원인이자, 그 열매였다. 이전과는 달리 그는 “남녀 사이의 예의조차 버리고, 남녀평등이니 해방이니 하며” 속으로는 남녀 간의 자유연애를 즐겼다. “말로는 사심이 없느니, 거룩한 마음이니 하면서도 사심을 품은 더럽고 추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한 적이 많았다. 여자에게 쓸데없는 편지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자유연애의 바람은 경성성서학원을 강타했다. 결국 1919년 교수 이모 씨와 사감 최모 씨 사이에 “과도히 친밀하여” 불미한 일이 생겼고, 두 사람은 1920년에 면직되었다. 청소년기를 앞둔 성결교회가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깊은 어두움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