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전 국토교통부 차관보의 증조부
면민들이 송덕비 세워 은덕 기려
후손들 “이웃 사랑의 정신 이어졌으면”

최영철 전 국토교통부 차관보(잠실교회 안수집사)의 증조부 최한경(崔漢京) 선생(1856년 8월 11일~1932년 8월 21일)이 일제 강점기인 1921년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남 담양군 대전면 1,194호 농가의 호세(戶稅, 주민세)를 대납해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김철영 목사가 최근 후손들로부터 최한경 선생의 아름다운 미담을 듣고 전남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396번지에 소재한 최한경 선생의 생가와 1923년 대전 면민들이 최 선생의 은덕을 기려 세운 송덕비 현장을 찾아 아름다운 선행을 직접 확인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30대 후손인 최한경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들 최순호 선생에 이어 손자 최창언 선생(교육자, 최 전 차관보의 부친)이 살았던 집으로 100여 년 전에 지은 집이다. 집에 들어서면 마당 오른쪽에 ‘최씨 삼세 유장비(崔氏 三世 遺庄碑)’가 세워져 있는데, 최한경 선생이 남겨준 전답(田畓) 등 소유했던 재산 내용 쓰여 있다. 최한경 선생은 일제 강점기 전답을 많이 소유한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중옥리에서 출생해 평생 그 마을에서 터전을 일구었던 최한경 선생은 1921년 흉년이 들어 지역민들이 호세(戶稅, 주민세)를 납부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1194호 농가의 주민세를 대납해주기로 결심하고 1194호 농가의 주민세 1359원 90전에 해당하는 쌀 271석을 대납해 해결해 주었다. 당시 쌀 한 석은 두 가마니 160kg으로 5원이었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엄청난 금액이다.

이런 최한경 선생의 이웃 사랑에 감동한 지역민들은 1923년 3월 20일 대전면 농협 앞에 ‘송덕비’를 세워 아름다운 이웃 사랑을 기리고 있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녀인 최호자 권사(서울대 약대 CCC 나사렛형제들)는 “교육자이셨던 아버지(최창언)로부터 증조부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 적에 광주에 살면서 언니들과 할아버지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며 최한경 선생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최 권사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집에 들었는데 증조부님이 ‘밤손님도 손님’이라며 돈 꾸러미를 내놓으면서도 도적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계셨다고 한다”며 “그런데 도적이 감동을 받아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면서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훔치게 되었다며 반드시 돈을 갚겠다고 했다 한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셨던 분”이라고 밝혔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자녀들 중 영선은 화순 동복중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원경은 충남방직에서 재직했고, 영준은 (주)대우 임원을 지냈다. 증손녀 황자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유종호 목사(CCC 김준곤 목사 비서실장 역임)의 사모로 남편의 대학생 선교 사역을 내조했다. 증손녀 영신은 미국 하와이대 일본어학과 교수를 지내며 CCC 지도교수를 맡아 대학생 선교사역을 협력했다.

최호자 권사의 남편 전용태 장로(법무법인 로고스 설립자)는 춘천, 청주, 인천, 대구지검 검사장을 역임하면서 성시화운동에 헌신해 재단법인 성시화운동 이사장과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초대 총재, 대표회장으로 국내외 도시 단위를 순회하며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깨끗한 도시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왔다.

전용태 장로는 “아내의 증조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분이셨다”며 “그 집터와 송덕비가 담양군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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