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교총 총무단, 전남기독교문화유산 답사
야월-염산교회, 1950년 집단순교 비극
성결교 문준경순교기념관도 필수 코스
1987년 설립 양동교회는 사회사업 앞장
교육-의료사업에 보육원 설립도 관여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장종현 목사) 회원교단 총무단이 지난 7월 10~12일 호남지역 근대기독교문화유산 답사를 실시했다.

총무단은 2박 3일 동안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를 시작으로 염산교회,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전남 목포시 양동교회, 공생원, 목포근대역사관,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을 방문해 순교영성 함양은 물론, 근현대 역사 곳곳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기독교 유산의 흔적을 쫓았다.

첫 방문지인 야월교회는 6.25전쟁 당시 전교인 65인이 북한군에 의해 순교한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교회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5일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고 난 후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과 애국운동, 신앙교육 등을 통해 지역의 근대화와 복음화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1950년 9월부터 10월 사이 북한군과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교인 65명이 한 명도 남김없이 산채로 매장되거나 수장되어 순교를 당했다.

1950년 당시 9살이던 최종한 장로(83세)는 그때의 참상을 떠올리면 지금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 장로는 “지금도 이 마을에는 야월교회 성도들을 죽인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우리 예수님은 아무리 큰 죄를 져도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분이다. 그 사랑으로 지금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복되게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야월교회가 다시금 교회로 재건되고, 지역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성결인의 헌신과 기도가 한 알의 밀알처럼 밑거름이 됐다. 최 장로는 “1952년 천호동교회 안창건 목사님이 내려오셔서 야월교회 부흥을 위해 2년간 헌신하셨다”며 “매일 집집마다 방문해 전도하고 기도해주셨다. 너무나도 훌륭한 목사님이셨다”고 회상했다.

염산교회(최성남 목사)도 당시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77명의 교인이 순교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야월교회와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중에 하나인 염산교회는 6.25전쟁 당시 국군이 전남 영광군에 진군해 왔을 때 퇴각하지 못한 일부 북한군들이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돌멩이를 달아 수장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이나 칼로 찌르며 죽이는 참상이 벌어졌다.

염산교회의 순교 역사를 설명하며 전시관을 안내한 최성남 목사는 “내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루만 산다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한다. 염산교회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순교자의 피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넘치기를 늘 기도하고 있다”며 총무단에게 삶과 사역 가운데서 순교영성으로 무장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한교총 총무단의 근대기독교문화유산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우리 교단의 자랑인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이었다. 문창국 총무는 기념관 도착 전부터 총무단에게 문준경 전도사의 삶과 신앙을 소개해 원활한 관람을 돕는 한편, 성결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순교 영성의 이해를 도왔다. 총무단의 방문 소식을 듣고 특별히 순교기념관장을 지낸 김헌곤 목사(한국교회순교자협의회 대표)도 큐레이터를 자처해 해설에 나섰다.

순교자 윤임례 집사의 손자이기도 한 김 목사는 가족 13명을 죽인 북한군을 용서한 한 순교자 가족의 일화를 소개하며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순교신앙만 제대로 갖춘다면 어떤 위기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원수에 대한 증오와 원망도 녹인 십자가의 화해와 용서의 힘은 순교영성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해방 이후 서로 죽고 죽이는 사건이 끝나게 된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품으면서부터였다”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믿음 안에서 하나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순교신앙 덕분이었다”고 강조했다. 

전남 신안군을 떠나 목포로 답사지를 옮긴 총무단이 방문한 곳은 전남광주 지역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다. 목포 개항과 같은 해인 1897년 3월 5일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양동교회는 근대화에도 앞장서 교육 및 의료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고아들을 돌보는 공생원도 당시 양동교회 교역자로 섬겼던 윤치호 전도사가 설립했다.

나라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양동교회는 제8대 담임목사인 이경필 목사를 중심으로 목포 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경필 목사를 비롯해 교인들이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양동교회에는 순교자의 피도 흐르고 있다. 제10대 담임목사였던 박연세 목사는 일본 고등계 형사로부터 중일전쟁 5주년 기념일인 1942년 7월 7일에 일본을 찬양하는 설교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도리어 ‘악육강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일본을 비판했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육으로는 천황폐하를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라는 설교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탄압 끝에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2월 15일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동사했다고 알려졌다.

이어 총무단은 양동교회와도 인연이 깊은 공생원을 찾았다. 윤치호 전도사는 1928년 여러 명의 불우한 고아들을 데려와 양자, 양녀로 키우다가 보육원인 공생원을 설립했다. 1938년에는 총독부 관리의 딸인 타우치 치즈코를 만나 결혼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타우치 치즈코는 결혼 이후 윤학자로 이름을 고치고 윤치호 전도사와 함께 공생원 사역에 헌신해 죽을 때까지 고아들을 돌봤다. 

특히 윤학자 여사는 남편인 윤치호 전도사가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1951년 1월 26일 실종된 이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고아들의 곁에 남았다.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윤학자 여사가 돌봤던 고아들만 3,000여 명에 달한다. 윤학자 여사의 헌신에 감사함을 가지고 있던 목포 시민들은 그의 장례를 시민장으로 치르며 예우를 다했다.

근대기독교문화유산 답사를 마친 문창국 총무는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며 예수를 증거하는 모습과 성도들을 앞장서서 잡아 죽였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원수갚는 길이다’라고 말할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며 “자신의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믿음으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순교자 후손들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