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성서학원에서 2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명직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 곧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인생의 목적도 새롭게 정립 되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은혜를 받는 것도 어렵지만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침체(spiritual stagnation)나 심지어 영적 퇴행(spiritual backward)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역자의 길을 내디딘 지 오래지 않아 이명직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귀국 후 이명직은 개성전도관의 부임교역자(1911-1914)가 되었다. 당시 주임교역자는 강태온이었다. 1909년에 설립된 개성전도관은 무교동, 진남포에 이어 세워진 전도관이었다. 1912년에는 경성성서학원을 갓 졸업한 이명헌도 부임교역자로 합류했다. 이명직과 이명헌은 한 팀이 되어 노방전도에 매진했다. 그리고 명절이나 초파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특별전도집회를 갖기도 했다. 또한 이명직은 기존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결집회를 열어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집회들은 종종 경찰에 의해 제지를 받기도 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인지라, 일제의 허가를 얻어야 집회를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에게 한국교회는 눈엣가시처럼 거북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일제의 한국통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성은 백만인구령운동의 본거지로, 부흥의 불씨가 살아 있었다. 따라서 개성 지역의 전도자들을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더욱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명직은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한편 이명직은 강태온과 함께 남감리교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여 잠들어 있던 교회를 깨우며 큰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다.

개성전도관은 주임교역자 강태온과 부임교역자 이명직의 열심에 힘입어 성장했다. 그 결과, 1913년에는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여러 차례 이사한 끝에 새 건물을 마련하여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 건물은 무교정전도관에 이은 두번째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노고가 인정되어, 1914년 경성성서학원에서 열린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목사안수식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때 목사안수를 받은 한국인은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 등 5명이다. 이들은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이력(履歷)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역의 길을 나선 이에게 목사안수는 인생과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개인의 큰 영광이며 기쁨일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이는 이명직 목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훗날 이명직 목사는 당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피력했다. 

“22세에 학원에서 졸업하고 귀국한 후, 세월이 오래 지나감에 따라 은혜의 정도가 높아지지 못하고, 점점 더 냉랭하게 되었으며 단지 가장(假裝)한 일개의 평범한 전도사가 되었다. 그때도 나는 성경을 가르치고, 들은 교리를 전하고, 배운 것이 설교라 입으로 나발거리는 데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설교를 수년 동안 훈련하고 전달하니 연설도 능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하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성신(聖神) 없었다. 처음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단체에서는 이를 알지 못하고 그에게 목사안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25세의 청년으로 귀중한 목사의 성직을 받을 때, 사실 나는 겸손하기보다는 자고한 마음을 가졌다. 그때 내게 양심이 있었다면, 이 직분을 감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과거를 돌아보면 냉담하다. 실패이다. 누가 나의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었으랴! 오직 성신께서는 아시고 탄식하신 줄 이제야 깨닫는다.” 이명직은 자신의 냉담한 내면 세계가 열심과 열정이라는 외식(外飾)에 의해 가려져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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