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힐링은 구원이며 회복입니다. 값싼 위로나 자기 체면이나 도교적 만족이 아니라 인간실존에 내재된 죄와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데이빗 A. 씨멘즈(David A. Seamands)는 <상처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극서(極西)쪽 지방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삼나무와 적색 삼나무들을 보게 된다. 식물학자들이 큰 나무를 잘라 낸 절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에 나타난 이 테는 아주 가물었을 때를 표시합니다. 여기 몇 개의 테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 때를 표시합니다. 여기 이 테는 번개에 맞았을 때이고 이것은 정상적으로 성장한 표시입니다. 이 테는 숲 속에 불이 나서 나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이고 이쪽은 사나운 병충해와 질병이 유행했을 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무의 심층부에 박혀졌고 나무의 성장과정이 기록된 자서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쓴 것처럼 잘 감추어진 우리의 모습 내면에 인생의 나이테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 생의 이면을 보여주는 아주 통찰력이 있는 글입니다. 인생의 나이테가 온전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시 나의 나이테는 일그러지고, 찢겨지지는 않았을까? 목회를 하다보면 교인들의 나이테가 드러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가면을 쓴 것처럼 페르조나(persona)로 잘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면 상처로 보이고, 아픔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옹이가 져서 도무지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스프라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ζομαι)의 회복 교회는 그 영혼의 상처를 싸매고 돌보는 치유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와 더 많은 상처를 안고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우리 속에 스프라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ζομαι)를 회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프라크니조마이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칠 때 가지셨던 마음입니다(마 9:36). 바로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말은 주 예수님의 큰 연민(compassion)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뜻을 따르면 “그의 심장이 감동되다”는 뜻이며,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고통감과 그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말합니다.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사실은 이 스프라크니조마이의 마음 때문입니다.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하며 질고로 인하여 생의 고난을 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직접 흘려주신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인데, 그 인류의 고통을 마음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교회는 이 스프라크니조마이가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성결교회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은 이 스프라크니조마이가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전도표제입니다. 이 흘러넘치는 연민의 마음을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이 표출한다면 그곳이 곧 교회천국이며, 치유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 중심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되는데 그것이 상처난 마음 때문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화두가 힐링(healing)입니다. 이 힐링이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신흥종교에서 이 힐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힐링은 대체로 자기본위의 힐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힐링은 죄악된 인간의 심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스프라크니조마이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힐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힐링은 구원(salvation)이며 회복(restoration)입니다. 값싼 위로나 자기 체면이나 자연친화론을 통한 도교적(道敎的) 만족이 아닙니다. 인간실존에 내재된 죄와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말미암은 선물이며,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이 실천해야 할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 실존적 상처를 지닌 자들을 끌어안는 공동체입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서로를 끌어안는 치유공동체를 이루어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임종환자를 찾아가는 목사 임종환자를 대면하는 목사와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참담함을 지니고 심방을 합니다. 지속적으로 찾아가 기도해주고 함께 있어줍니다. 그 과정에 임종환자에게서 영적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가 생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목사가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아멘, 아멘”합니다.

엘리자베스 큐블로 로스(Elisabeth Kubler-Rossd)의 ‘On Death and Dying(인간의 죽음)’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 시기는 부정과 고립의 단계를 넘어섰고, 분노의 단계도 넘어 섰고, 타협과 흥정을 지나, 우울과 침체를 벗어났습니다. 수용과 순응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순응의 단계에서 그의 입술이 열리며 “아멘, 아멘”합니다. 그때 그 목사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아멘입니다 그대 이름은 / 아멘입니다 //

맑고 고운 / 입으로 순응하던 / 고백의 언어는 / 아멘입니다 //

거센 바람이 / 창가에 부딪힐 때 / 조용히 외치는 기도는 / 아멘입니다 //

마음에 일어나는 / 자그만 파도를 잠재우는 / 손길은 / 아멘입니다 //

마침내 / 지상의 옷을 벗고 / 두 눈을 고요히 감으며 / 그리운 님의 품에 안길 때 //

순결한 영혼의 숨소리는 / 아멘입니다

그 목사는 환자의 영혼에 깊이 배겨 있던 나이테의 옹이들이 그제야 다 풀려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로소 임종환자나 목사는 지상에서 최후의 행복의 절정을 공유합니다. 실존적 치유공동체의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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