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뜰에 서서 강 건너 쪽을 쳐다보면 빨간 십자가와 교회 건물 몸체 중반까지 바라다 보이는 집 가까이에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가려면 사계절 내내 물에 잠겨 있는 보(洑) 하나를 건너야만 했다. 우리들의 하루 일과는 어머니의 새벽기도부터 시작되었는데 기도 가시는 어머니의 양 볼을 새벽 찬 공기가 쓰다듬어주어서 항상 어머니는 분홍빛 얼굴이셨고 보를 건너시느라 맨발에 사천강 찬물로 씻음 받고 새벽마다 세례 받은 사람인양 은혜를 한 광주리씩 받아 안고 힘이 넘치게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예수뿐일세~”를 부르시는 찬양소리가 60여년이 지난 지금, 어느 가수 노래 소리보다 좋았으며, 철철 넘치는 은혜의 찬송이 우리 4남매의 잠을 깨워 가정예배로 이어가게 했었다.

다섯 명 가족이 둘러 앉아 예배드리면서 순서대로 대표기도를 하게 했던 덕분에 장성해서도 모든 대표기도에 어려워하지 않는 우리 형제들이 되게 하셨고, 찬송가 64장(이 몸에 소망 무엔가) 222장(주님 찾아오셨네) ‘예수 누구 신고하니’ ‘예수가 내게 계시니’등 옛 찬송 장수를 다 기억할 수 없으나 주로 주님을 의지하는 찬송을, 그것도 4절까지 외우며 불렀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가족 특송을 자주하고 학생회장, 청년회장을 하도록 지도하여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어렵지 않게 했으며 회의진행이나 회원 아우르는 요령과 기술도 그때부터 배우도록 도와주신 것 같다.

어머니의 목사님에 대한 예우도 남달라 목사님 심방 오시는 날이 우리 집 잔칫날이요, 우리들이 기를 펴는 날이었다. 조르고 떼쓰고 제일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함께 먹고 기도 받곤 했다. 암탉이 울 때마다 모아진 계란은 항상 알이 크고 좋은 것은 목사님 바구니에, 그 외 것은 우리 바구니에 담으면서 목사님 오실 날을 기다리던 그때 그 마음 알 것 같은가? 참 좋았다. 감 홍시 중 제일 좋은 것 골라 익혀서 드리고, 쌀강정도 바르게 잘 짤려진 것만 드렸다. 그러나 드린 것은 조금이요, 축복기도는 크게 받았다.

그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멋지고 신기한 것은 목사님이 다 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목사님이 출장을 다녀오시면서 미제 크레용을 사다 주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려 온 방이 그림방이 되었다. 그 당시 국산 크레용은 잘 부러져서 그림을 그리기에 참 불편했고, 그래서 크레용이 있어도 자랑만 할 뿐 그림도 그리지 않고 남의 그림 그리는데 훈수만 두는 얌체 같은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튼 한해에 한번만 받는 우등상의 기억보다 목사님의 선물로 행복했던 기억이 더 감격스러워 아직도 헐지도 낡지도 않은 필름으로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 집 호주는 예수님이요, 우리 집 대주는 목사님 이셨기에 아버지 얼굴조차 잘 모르는 우리 형제들(막내는 유복자)은 아버지가 안 계시는 아쉬움, 외로움을 몰랐고, 청춘에 혼자되신 어머니의 고달프고 어려웠을 삶도 어머니 입에서 찬송 끊어질 날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그 고생을 한번 제대로 걱정해 드리지 못한 불효 4남매였다는 것을 장성한 후에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평생을 공직에 있었던 나는 평소 공무원은 ‘보고가 생명’이라며 본인의 실천은물론 직원들에게도 항상 강조했었다. 나의 잘못을 상급자에게 보고하여 잘된 것은 칭찬받고 못된 것을 시정하는 단계가 공무실패의 예방이 되고 발전의 기반이 되며 공직생활을 평탄하게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생활방식이 꼭 이와 같았다.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보고하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셔서 보고하는 제목 하나하나에 잘했다, 부진했다, 잘못했다 점검하시고 서명해 주시는 분이 계셨으니 큰 길 두고 샛길 가실 수 없었고, 좋은 길 두고 가시 덩쿨로 가시지 않았으리라 싶다. 아침 예배드릴 때 “하나님 첫째가 어제 중학교 입학시험 합격 통지서 받았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 우리 큰애 시험 합격했습니다. 기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채 공사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집 보러 오십시오.” 이렇게 집안의 대소사를 계획하고 추진하고 후원하신 호주 하나님과 대주 목사님이 계셨기에 어린 시절 그저 행복할 수 있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의 필름을 한참이나 돌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그 옛날이 너무 좋더라고 되내어 본다. 철부지 아이 때가 좋았고, 농사짓는 순수함이 좋았고, 냇물 가득하고 다슬기와 은어가 노니는 사천강이 좋았고, 무엇보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지금보다 참 좋았더라.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