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고
“모르겠다”며 도망갔을 뿐이지만
책임회피의 결과는 너무나 컸다
본 교회가 멀어 가끔 집 근처 교회엘 나가곤 한다. 퇴계원 빛과소금교회는 지역사회에 관심이 크다. 교회 인근 어려운 이웃들에게 솜이불을 만들어 나눠주기도 하고, 낡은 가옥을 수리해주기도 한다. 이번 창립 117주년에는 교인들에게 1만원 짜리 쿠폰을 나눠주었다. 교회 주변 음식점들을 이용하라고. 1,200만원 어치의 쿠폰을 나눠줬으니 적어도 배 이상의 매출은 오를 것이다. 정부도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해드렸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던 최부자의 7계명이 떠오른다.
주민 대상으로 문화센터를 운영하던 교회들이 지역 내 사설학원업체들의 항의로 문을 담은 일이 있다. 교인 대상으로 평일에도 카페를 운영하던 교회들도 같은 이유로 문을 닫기도 한다. 교회도 법적으로는 문화센터나 카페를 운영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에 대한 ‘책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권리와 의무는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기본적인 합의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도 행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책임은 권리와 의무를 초월한다. 그런데 책임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범위가 좁은 이들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폐를 끼치지만, 범위가 넓은 이들은 선한 영향력으로 공동체에 유익을 가져온다. 자선사업가나 기부자, 시민운동가나 자원봉사자, 독립운동가, 해외 선교사들이 그런 이들이다. 사랑은 이처럼 권리와 의무라는 틀을 초월한다. 사랑은 책임이다.
요즘 우리네 책임의식은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 권리만 따지고 책임의식은 뒷전이다. 권력자나 공직자들은 왜 그러한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지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권력’으로 키워볼까 혈안이다. 유권자들도 그렇다. 공동체의 번영보다는 사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 교계의 총회도 전당대회를 닮아가고 있다.
‘책임(Responsibility)’의 반대되는 말은 ‘무책임’이라기보다 ‘손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벌인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슬며시 발뺌을 하니 결국 누군가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책임의식이 낮는 사람들은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 배출도 하지 않는다. 먹고 남은 음료통을 벤치에 그냥 두고 일어선다. 부모나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약속을 쉽게 어긴다.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앞세운다. 이런 이들이 인정을 받으며 살아갈 틈은 인생에 그리 넓지 않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의 이 구절을 암송할 때마다 빌라도가 참 억울해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는 않았다.그저 “난 모르겠다”며 손을 닦고 도망쳐버렸을 뿐이다. 그 책임회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 결과로 그는 가룟 유다보다 더 큰 죄인 취급을 받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는 말이 있다.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를 말한다. 손잡이 없이는 맷돌을 돌릴 수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정치인, 법조인, 공무원, 기업인, 예술인, 체육인, 언론인, 그리고 군 지휘관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거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 전체가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 교계도 마찬가지다. 목회자, 중직자, 신학자들이 거룩한 소명과 사명은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욕망을 지향하니 부끄러워서 낯을 들 수가 없고, 세상의 잘못을 꾸짖을 수가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이 말은 누군가 미국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이게 어디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끄는 모든 이가 귀를 기울여야 할 말이다. 트루먼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책임을 맡지도 마라!(If you can’t stand the heat, get out of the kitchen)”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권리와 의무를 초월하여 세상을 향한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갔으면 한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