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감사절 의미와 유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매해 7월 첫째주일이 되면, 맥추감사주일로 기념한다.
맥추감사주일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기념하는 토착적인 절기로서, 한국인들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 달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추수감사주일이 17세기 북미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된 것과 같다.
하지만 한국사회와 교회가 급속하게 산업화,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그 고유한 정서와 문화, 달력이 쇠퇴하므로, 현재는 절기의 명목만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맥추감사주일을 준수하는 시기가 돌아올 때마다, 그 의의와 의미에 대한 의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삶과 문화로 돌아보는 맥추감사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시기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아가는지를 우리 조상들과 고대 이스라엘의 삶과 문화를 돌아보며 살펴보자.
첫째, 우리 조상들은 해와 달의 움직임을 고려해 날과 계절의 변화를 파악하고, 24절기를 두어 한 해의 농사를 계획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나라처럼 해와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날과 계절의 변화를 파악했고, 시기마다 절기를 두어 한 해의 농사를 계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대력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가 내리는 겨울의 우기(10월~4월)와 비가 내리지 않는 여름의 건기(6~9월)로 구별된다. 신명기 11장 14절의 이른 비는 우기의 시작을 의미하고, 늦은 비는 우기의 끝을 의미한다.
둘째, 한반도는 벼농사를 지으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를 갖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주식은 밀가루 반죽을 넓적하게 만들어 화덕에 구워낸 납작빵이다. 발효된 것을 유교병, 그렇지 않은 것을 무교병(맛짜)이라 한다. 고기나 야채, 과일 등을 빵과 함께 곁들여 먹는 식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땅에 농사지으며 심는 작물들은 바로 그들이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셋째, 15세기 이후의 한반도의 벼농사는 모내기 농법(이앙법)을 통해 지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농법은 직파법에 의존하므로 지력을 소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정기적인 휴경, 즉 땅의 안식년이 필요했다.
넷째, 땅과 계절이 다르므로, 추수의 때도 달랐다. 한반도 남부지방의 경우, 이모작을 도입한 이래로 가을에 벼를 추수하면 보리를 심었다. 보리는 천천히 여무는 특성이 있으므로, 보리의 추수를 기다리려면 겨울과 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면 벼의 추수와 보리의 추수 사이 5~6월 어느 정도의 틈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쌀이 떨어져 곤란에 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를 춘궁기, 즉 보릿고개라 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엔 사람들이 감자와 같은 구황작물을 먹으며 버텨내기도 하였다.
반면, 고대 이스라엘은 크게 세 번의 추수를 했다. 3~4월에는 보리 추수를, 5~6월에는 밀 추수를, 9~10월에는 포도와 올리브 등을 추수했다. 3~4월 즈음 보리의 첫 추수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나아가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출12:1-14; 레23:5; 신16:1-8), 무교절(출12:15-16; 레23:6-8), 맥추절 또는 초실절(출23:16a; 레23:10-11)이다.
보리의 첫 추수로부터 49~50일 정도가 지나면, 이제 밀을 처음으로 추수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된다. 5~6월이 되면, 이제 농부들은 서둘러 밀을 수확할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께 첫 수확한 밀을 감사의 예물로 올리며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는 칠칠절 또는 맥추의 초실절(출34:22a; 민28:26-31; 신16:9-12), 신약에서는 오순절(행2:1, 20:16; 고전16:8)로 소개된 바로 그 절기이다.
맥추의 초실절 기원은?
혹자는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들 것이다. 앞서 보리의 첫 추수를 기념하는 날을 맥추절이라 했는데, 왜 밀의 추수를 가리켜서도 맥추의 초실절이라 하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출애굽기 23장 16절을 살펴보자. 본문의 “하그 하카찌르 비쿠레이”에 대한 모든 국역은 “맥추절”로 되어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맥추감사주일 전통을 반영한 관용적 번역이다.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살리자면, “(보리의) 초실절”이 적당하다.
다음으로 출애굽기 34장 22절 초반의 “비쿠레이 크찌르 힛팀”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는 “밀의 초실(절)”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맥추의 초실절”이라는 번역은 어떠한가? 한자 맥(麥)은 보리(대맥)와 밀(소맥) 모두를 가리킬 수 있으므로,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의미 상 크게 틀리지 않지만, 보리와 밀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오늘날 맥(麥)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역의 전통은 오늘날의 언어습관에 맞게 개선될 필요가 있다.
상술한 맥(麥), 즉 보리(대맥)와 밀(소맥) 추수와 관련한 고대 이스라엘의 봄 절기들은 이른 비(가을 비)와 늦은 비(봄 비)가 내리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농경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절기가 제정된 배경은 그보다도 이른 이집트 탈출과 이후의 광야 경험으로부터 기원한다.
3~4월 보리 추수와 관련되는 유월절 또는 무교절은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넘어간 뒤,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구원의 사건과 연결된다. 신약에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으로 승화된다.
5~6월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기록된 말씀을 받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사건과 연결된다. 신약에서 이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온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기폭제가 되었던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으로 승화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입성과 정착 이후에도,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곡식을 추수하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들 민족의 역사(歷史) 속에 역사(役事)하신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었다.
조상들을 구원하신 임마누엘 주님께서, 오늘 그들의 땅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눈이 밤이나 낮이나 함께 해주시기를, 당신의 손으로 항상 돌보아주시기를, 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적절히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땅은 삶의 바탕, 하늘은 삶의 희망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영접한 우리의 선진들에게 땅은 유일한 삶의 바탕이었다. 또한 하늘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그러므로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뢸 수 밖에 없었다. 마른 땅이 변하여 샘이 되게 하시고, 또한 샘을 마른 땅으로 만드시기도 하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시107:33, 35). 그래서 기도했던 것이다.
벼를 심을 때나, 보리를 심을 때나, 저기 저 가나안 땅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당신의 눈, 당신의 손, 당신의 은혜의 단비, 여기 이 땅, 이 밭에도 임하여 주시옵소서.
아슬아슬한 위기도 있다. 지난 가을 벼농사를 간신히 잘 거둬들여서 겨우내 살림을 잘 지켜냈는데, 봄이 되니 아슬아슬하다. 심어둔 보리가 여무려면 한참이다. 아이들은 아우성인데 쌀독은 텅 비어간다. 어디 나가서, 감자라도 캐야하나 싶다. 그런 보릿고개의 순간, 입에서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여, 도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니 첫 보리의 추수는 그 간절하디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감격이자, 감사였다. 자연히 주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긴 시간을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나의 첫 열매, 첫 소산을 기꺼이 드릴 수 있었다. 그것이 보리이든 밀이든 무엇이든 어떠하랴.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촉촉이 닿은 그 열매라면 기꺼이 드리리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결단으로 무더운 여름, 맥추감사주일을 보냈으리라.
도시에 맞는 감사절기 제안도 방법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보리 추수 이야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도시 생활에 맞춘 새로운 감사절기를 제안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근로자의 날이 있는 5월을 오순절 또는 성령강림절과 연관하여 감사의 절기로 제시하는 식이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의 도시 근로자들도 삶의 순간 가운데 하나님께 간청하고 응답을 경험하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그런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토착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대 속에서 교회가 새로운 표현들을 제시함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