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변해가는 것을 모르는 ‘변화맹시’
주를 따른다 하면서 무엇에 몰입하기에
변화해가는 나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가

변화맹시(Change Blindness)는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변화맹시를 실험한 여러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공을 패스하는 농구팀이 공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를 세어보라고 했다. 패스하는 공의 수를 세어보느라 지나가는 고릴라인형을 보지 못했다. 패스하는 공의 수에 집중함으로 다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변화맹시다. 지도를 들고 길을 찾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요청받은 사람은 길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데 관심을 갖다보니 사람에게 소홀해진다. 심지어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을 변화맹시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붐비는 번화가를 지나가는 사람은 번화가를 속히 빠져나가려고 한다. 붐비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니, 번화가에 코로나19 이후 비어있는 상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번화가를 빠져나가는 데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크고 작은 변화에 소홀해진다. 이것이 변화맹시라는 심리적 현상이다. 

엔진이 없는 비행기는 하늘을 날수 없기 때문에 엔진은 비행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비행기를 타는 승객은 비행기 엔진에 관심이 없다. 비행기 엔진이 바뀌어도 승객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승객은 여행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집중하다보면 다른 변화에 소홀해진다. 결국 작은 변화뿐 아니라 큰 변화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을 변화맹시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액체현대’라고 한다. 사회가 액체같이 급속히 변하고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열대에 어제 올라온 신상품이 며칠 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어제 만난 사람이 오늘 떠나는 경험을 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는 만나지 않아도 만난 듯 착각을 가지게 하고 곧 사라진다. 너무 급속히 변하기 때문에 만난 후에 이별을 말할 여유도 없이 떠난다. 애도할 시간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애도를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애도할 줄도 모르게 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변화맹시라는 심리적 현상은 더 자주 일어난다. 변화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변화에 익숙해지니까 변화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다보면 변화맹시가 흔하게 일어난다. 집중하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를 무시한다. 심리적으로는 변화를 못 알아차린다. 불안하면 불안하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까 주변의 변화를 못 알아차린다. 

내 주변에 나를 연예인 같이 대하거나 신같이 추앙하는 사람들로 둘러 싸여 있으면 변화맹시가 된다. 작은 변화를 못 알아차린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기독교인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세상에 숨겨진 변화가 있는데 기독교인은 변화맹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기에 무엇을 변화맹시하고 있는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이야기를 잘 기억한다(막 5: 21-34)에 무리에 둘러싸여 예수는 이동 중이었다. 추앙하는 무리들로 둘러싸여 있기에 예수는 무리들과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밀치는 사람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의 주변에는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밀치는 사람, 말을 거는 사람, ‘나 좀 고쳐주시오’하고 소리치는 사람, 조용히 숨죽이고 따라오는 사람, 함께 가다가 흥미를 잃고 무리를 떠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로 무리지어 예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변화맹시될 수 있었다. 무리에 휩싸여 있기에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변화맹시가 되었다면 예수는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추앙하는 사람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곧 십자가 죽음이라는 억울한 죽음을 당할까봐 불안과 두려움으로 싸여 있었다면 변화맹시 되어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몰입하거나 관심 있는 것에 몰입하고 있으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는 변화맹시 되지 않았기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을 수 있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무엇에 몰입하고 있기에 변화를 알아차리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해서 변화맹시 되고 있는 우리 자신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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