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먼저 들어야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으로부터 들을 수 있을까? 꼼꼼하게 본문을 관찰하고 그것을 근거로 본문이 말하는 의미와 장면을 재구성하는 상상의 작업,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단순히 본문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문으로 들어가 말씀을 경험하고 체화시키는 작업은 바로 성경으로부터 듣기 위한 노력이다. 이 정도 노력이면 성경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법도 한데, 여전히 성경이 들리지 않는 설교자들이 있다면 한 가지가 빠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바로 질문이다. 

성경에 질문해야 성경이 말을 한다. 본문에 질문해야 본문과 대화가 시작된다. 토마스 롱이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 그에 대해 알아가고 그를 다양한 분위기와 상황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혼자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근거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 것으로 추정한다면 이는 무척 어리석은 일이다. 상대를 관찰하고 의중을 추론하고 상상하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물어보고 확인을 한 후에야 비로소 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본문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이를 근거로 본문 속 장면을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하고 본문의 메시지를 추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문에 적절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을 사귈 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처음에는 본문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본문 속에서 행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다. 본문이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다면 본문의 사건은 무엇이며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으며 그 사건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계되어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파악이 필요하다. 본문이 어떤 개념을 말하고 있다면 그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개념을 말하는 저자는 어떠한 사람인지 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고난이라는 주제에 관해 설교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신앙 이후 겪은 패전과 유랑이라는 고난, 욥이 겪은 고난과 이사야서 53장의 종의 고난, 그리고 소아시아 교회의 종들이 억울하게 겪는 고난(벧전 4:12-19)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고난에 대해 말하는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했으나 시험당하는 욥, 온 세상 죄를 대신 지는 사명이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불의한 세상 속에서 고난받는 종들이 말하는 고난의 의미는 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고난이라는 단어를 본문에서 읽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본인이 생각하는 고난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대입하여 읽는다면 본문이 말하는 바와 전혀 상관없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제대로 묻고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욥기를 읽으면서 욥이 혹시 그리스도와 같이 세상을 대신하여 죄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욥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오도하고 말 것이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unjust suffering)을 말 그대로 “애매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고 덮어 놓고 원래 힘없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그레코로마 사회의 소아시아 지역에서 로마 가족제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인해 종들이 당하는 고난이 주인에게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부당한 고난(unjust suffering)이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설교자여, 묻고 들으라. 본문에 묻고 본문으로부터 듣는 것이 본문과 대화이고, 그것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