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가 버리지 못하는 환상이 있다. 언젠가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우리의 삶까지 바꾸어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최근 곳곳에서 정치권력의 전제군주화 현상이 목도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과 같이 계급투쟁의 원리를 신봉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확복하고자 자유와 평등, 민주와 인권을 목적하는 체제 내에서도 그러한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잘못된 환상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상이다. 

권위와 영광, 하나님의 선물인가? 악마의 유혹인가? 누구나 성공과 인정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성공과 인정의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누가 그러한 것들을 탓할 수 있을까?

이명직의 마음에도 성공과 출세의 야망이 꿈틀거렸다.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런 야망은 마치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가 18세였고, “이 시대에 나도 남과 같이”가 그의 인생 표어였다. 1908년, 그는 뜻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결혼한 지 1년만의 일이었다.

동경에 도착한 후, 이명직은 동경 대한기독교청년회(YMCA)에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동경에는 아직 한인교회가 없었고, 동경 YMCA가 한인 유학생들의 사랑방이었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반대로 교회 출석이 여의치 못했으나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했다. “나에게는 나의 뜻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뜻을 이룬 줄로 알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자신은 출세를 위해 일본에 왔지만 하나님은 신앙을 갖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사건에 비유할 만했다.

이명직의 초기 기독교사상은 YMCA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월남 이상재와 삼성 김정식, 고당 조만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특히 동경 YMCA의 총무 김정식과의 만남은 이후 이명직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황성 YMCA의 초기 지도급 한국인 인사들은 대다수 복음적이고, 신비한 체험적 신앙을 갖고 있었다. 

동경 YMCA는 1906년 8월 한인 유학생 사회를 결집할 목적으로 황성 YMCA의 부총무를 지낸 김정식이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김정식(1862-1937)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대한제국정부의 경무관을 지낸 인재였다. 경무관은 고위 경찰직으로 일선의 치안 책임을 담당했다. 김정식의 주된 직무는 구습철폐와 봉건사상 타파를 외쳤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주도 세력을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식은 1902년 3월 개화세력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한성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감옥에는 이승만, 이상재를 비롯해 40여 명의 유명 정치인들이 함께 갇혀 있었다. 

김정식은 이때 이승만의 옥중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연동교회의 게일(J. S. Gale) 선교사는 김정식의 회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감옥 안에서 나는 성경을 네 번이나 독파했지만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밤 한문으로 번역된 무디(Moody)의 설교집을 읽다가 갑자기 내 마음 속에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 가슴은 노래로 가득 찼고 내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1904년 석방된 후, 김정식이 연동교회를 찾아가 게일 선교사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김정식은 게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양반선교를 위해 세워진 YMCA에 가입하여 최초의 한국인 간사가 되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동경 YMCA를 세워 한인 유학생들을 결집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파송되었다(박명수. 한국교회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 88-91). 

당시 동경 YMCA의 주된 사업은 유학생을 위한 숙식 알선, 강습(일어, 영어, 수학), 운동회, 성서연구와 예배 등이었다. 그리고 회관에는 교실, 성경연구실, 독서실, 운동실 등이 갖춰져 있어 유학생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1909년 경 매주 주일저녁에 열린 집회에는 평균 81명의 유학생이 참석하고, 40여 명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한국인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9년에는 한인장로교회가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교파의 벽을 깨뜨리자는 취지하에 ‘조선예수교연합회’로 뭉치게 되었다. 여기에는 1908년 동경 유학길에 오른 고당 조만식의 영향도 컸다. 일본 동경에서 이명직은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