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 가까스로 예수님을 모셔오게 되었는데 중간에 예기치 않은 일로 지체되어 늦어졌고 결국 딸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 앞에 아버지는 무너지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는 치료 받아서 좋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 그 혈루병 여인을, 세상을, 그리고 예수님을 원망 할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세상.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그렇게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낙심하고 원망하게 만드는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그렇게 죽음의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는 무너지고 원망하지만 예수님만큼은 좌절, 낙심,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시간을 더 지체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릅니다. 그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럽지만 예수님의 시간과 때가 결국 가장 정확하고 옳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갑작스러운 일, 당황스러운 일,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에게는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다. 살길이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잔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구원의 역사와 열심은 세상의 환경이나 인간의 조건, 갑작스러운 상황 등에 의해 좌절되거나 무력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애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기 원하셨고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중간에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하여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거나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예기치 않은 일도 예수님의 손안에 있는 일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일일 뿐입니다.

셋째,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 좌절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새 생명이 일어나는 현장이 시작됩니다. 

지금 당신에게 절망과 죽음의 소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과 함께 예수님도 함께 계십니다. 그 소식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일 가운데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소식이 당신을 잠시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죽음의 소식, 절망의 소식이 중간에 들려오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 아이를 치유하기로 작정하신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되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절망과 고통, 문제 가운데 하실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소식을 그 일을 그 죽음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의 말씀, 새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살아나고,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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