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균 교수의 '십자가 아래서'
울어야 할때 울지 못하면 주님과 멀어진다
눈물 속에는 위로와 회복과 치료가 있고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이 있다
지난 사순절 기간 중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다가 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에 마음이 와 닿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울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갔을까?’ 생각하며 성경을 읽는데,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리아의 눈물이 안쓰러워 보였나 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시며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최초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이번에는 마리아의 눈물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마리아의 눈물이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제가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울고 싶었나 봅니다. 요즈음 여러 가지 일들은 많은데, 예수님 앞에서 펑펑 울지 못했거든요. 마음은 울고 있는데...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라는 마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을은, 갈릴리 호수 서쪽 항구인 디베랴의 북서쪽으로 5km 정도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숫가에서 육지 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때 일곱 귀신이 들려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온전케 된 후 예수님께 헌신했던 대표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약 1년 반 이상의 시간을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일하셨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이때 예수님에 의해 치유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그녀가 일곱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온갖 잡신에 사로잡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인격이 다 파괴된 채, 저주받은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의, 인간으로서의 모든 삶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같은 고뇌와 암흑의 생애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여인이었기에,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내어 울고 있습니다. 20장 11절에 나오는 “마리아는 울고 있더니”에서 “울고 있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우이아’는 ‘클라이오’의 현대 능동태 분사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눈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마리아의 격렬한 슬픔을 나타내 줍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대성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천사들이 나타나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했던지 천사들에게도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담긴 다정한 음성으로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하였는데, 예전에 들었던 그 사랑의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었을까요? 눈물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든지, 울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그만큼 절실하고 애절하며 진실한 순간이 울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쫓았을 때, 어디로도 갈 데가 없었던 하갈은 아들을 데리고 펑펑 웁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주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울었을 때에도 나타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울고 있을 때 찾아오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히스기야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을 때, 그것을 말한 선지자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생명 연장을 선포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선지자들은 무너져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눈물이 무너진 터전 위에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최초의 설교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을 전하시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비정상입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마음이 메말라 갑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하나님과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속도도 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있는 곳에는 위로가 있고, 진정한 회복과 치료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