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일간 신문의 토요일 판을 보면 맨 마지막 면에 그 주의 설교에 관한 안내광고가 실린다.  그런데 거기 실린 설교의 제목을 볼 때 마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거의가 천편일률적이고 식상하다. 거기에 예시한 설교제목을 보고 설교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교제목이 설교에 대한 관심을 소멸시키는 사례는 설교현장에서도 부지기수로 발견이 된다. 주보에 실린 설교제목이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듣고자 하는 열망을 사그라뜨린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문을 작성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설교제목을 붙이는 것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설교제목은 건물에 붙이는 문패나 간판과도 같다. 큰 돈 들여 르네상스식으로 지은 우아한 건물에 ‘춘자네 대포집’이라고 붙인다면 그것처럼 촌스런 부조화가 어디 있겠는가? 

설교제목은 심미적이어야 한다. 즉 미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작품성’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설교제목은 듣고자 하는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제목을 보고 설교의 전체 내용이 어림짐작된다든지 설교의 흐름이 파악되는 그런 제목은 제목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암호나 수수께끼 같은 모호함이나 설교의 내용과 전혀 동떨어진 제목 또는 설교내용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담아내는 제목은 바람직하지 않다.

 설교제목은 설교의 내용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정도 설교내용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아 사람아!’등의 제목에서와 같이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으나 설교를 다 듣고 난 이후에 제목과 설교내용이 연결되게 하는 것도 신선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설교자는 시대의 흐름에 민감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강단의 경건성을 수호할 책임을 진자이다.
설교제목은 그 형태상 명사나 동사 혹은 문장이나 구 등으로 분류된다. ‘사랑’ ‘희망’등 하나의 광의적인 명사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구나 절 등의 형태로 제한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열정 무위 그리고…’  ‘불신앙의 공간’ ‘최소가치 이후’ 등의 제목이라든지, ‘자유를 버린 자유인’ ‘갇혀서 누리는 자유’등과 같은 역설적인 제목도 추천할 만한 제목이다. 성경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많은 설교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설교자는 설교가 자칫 제목으로 삼은 성경본문으로만 경도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좋은 건물에 좋은 간판이 어울린다는 평범한 진리는 설교에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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