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어려울수록 인색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넘어야 한다
사랑의 끈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누군가의 초대로, 느즈막한 저녁 뮤지컬 ABBA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었다.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겹쳐, 현대적인 문법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매우 탁월했다. “오해의 늪을 지나,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오렴”이라는 가사가 담긴 타이틀 넘버는 내 마음에 와닿았다. 성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에게도, ‘성서를 이렇게도 읽어낼 수 있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뮤지컬에 등장하는 ‘요나’는 둘이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요나서의 요나이고, 다른 하나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로부터 창작된 인물 요나이다. 두 요나 모두 복합적인 캐릭터성을 갖는다. 그 누구보다 강한 신앙과 신념을 갖고 있지만, 요 ‘나’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좁은 시야를 갖고 있다. 그러니 완고하고, 인색하다. 그러니 무자비해 보이기도 한다.

마침 직전 학부생들에게 이사야서 강의를 마친터라, 예언자 이사야가 겹쳐보였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낼꼬”라고 하실 때, 그 분의 존전에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그 당차디 당찬 젊은 이사야 말이다. 그 즉각적인 대답에는, 어떠한 꿈과 희망마저 엿보이는 것만 같다. 그 이름처럼 주님께서 곧 우리를 구원하시겠구나라는 그 꿈, 그 이상.

하지만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꿈과 희망을 잠시 유보한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눈과 귀가 닫힌 자들을 잠시간 내버려 두겠다는 저 선언은, 구원의 희망에 잠시나마 들떠 있을 예언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마치 뮤지컬 속 두 요나가 경험하는 좌절처럼.

사실 이 요나들은 나와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잘 믿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시야에 갇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요 ‘나’ 때문이다.

시편 88편의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어둠과 사망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는 희망의 끈조차 포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삶이 막연하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눈과 귀를 닫으시고 침묵하시는 듯한 주님에 대한, 원망만 쌓여갈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회복이란, 부활이란 마치 없는 단어 같다. 음영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영역 같다. 그 음영은 누가 만들었는가. 눈과 귀를 닫은 완고한 나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나에게 닿을리 없다.

결국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열 수 없다. 이미 눈에는 대들보가 박혀있고, 귀에는 물이 가득찼다. ‘에바다’의 기적 외에는 방법이 없다. 너와 나의 눈과 귀가 열리도록. 그 열린 눈과 귀가 주님을 향하도록.

삶이 고단하고 어려울수록, 자비 없고 인색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허들을 넘어야 한다. 아니, 넘어설 수 있다. 사랑의 끈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사랑으로 잇고, 나와 너 사이를 용서와 화해로 인도하는 그분 말이다. 그렇다. 기적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기적의 체험으로부터, 참된 부흥이 시작되리라.

돌아오는 길, 초대해주신 분으로부터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삶의 여러 굴곡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용서로 안아주셨기에, 나도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었다는 간증이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소망을 볼 수 있었다. 품어주심, 안아주심. 그리고 받은 사랑을 넘치도록 흘려보내는 것. 바로 이것이 기적의 시작이구나. 그 기적이 오늘 모든 이의 삶 속에서 시작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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