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청받은 교회에서 전할 설교원고 작성을 마치고 호기심으로 AI에 설교 제목과 성경본문을 입력하고 원고를 기다렸다. 1분도 되지 않아 입력한 대로 제목을 중심으로 한 원고와 본문을 입력한 원고 2편이 나왔다. 참 신기했다. 나는 한 주간 동안 밤낮으로 생각하며 작성한 원고를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작성하다니… 내용을 분석하며 내가 작성한 원고와 비교하여 보았다. 내가 작성한 원고보다 논리적이고 언어도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통찰력도 있다. 나보다 잘 썼다(?).” (허상봉, AI가 써준 설교를 대독만 할 것인가, 한국성결신문 제1398호) 

▨… 그의 설교는 대체로 원고 설교로 소문이 나있다.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준비한 원고를 설교하기 전에 40~50번 이상 낭송해 원고 없이 설교할 수 있도록 암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blog, 목동중앙데이케어센터) 그런 그가 묻는다. ‘밤잠과 새벽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심하며 기도하면서 원고를 작성하는 설교자들은 AI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설교원고를 어떻게 생각할까?’ ▨… 글을 읽으며 “나보다 잘 썼다(?)”라는 표현에 물음표(?)를 단 의도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 성령의 역사를 설교의 필수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면 내가 작성한 설교보다 뛰어나지만 성령의 역사가 전제되지 않는 설교가 가능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보다 잘 썼다라는 표현에 녹아 있지 않다면 AI의 설교를 긍정하게 되는 것 아닌지 묻고 싶었다.

▨…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 안에서만 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말씀으로서, 설교라는 형태의 말해진 말씀으로서 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현재는 설교로서의 현존이다. 설교 안에서 낮아지고 높임 받은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현재하시는 것이다. 설교는 우리가 지켜야 할, 또 우리가 거기에 묶여 있는 현재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참조, 채수일, 누구인가 나는 )

▨… 에릭 프롬이었던가. 과학기술은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버린다고 갈파했던 사람이, 설교하는 AI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려는 결의 또한 애초부터 그 삶에서 드러날 수 없는 AI의 설교가 교회에서 난무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설교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가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무너질 것이다. 아니, 그런 교회는 무너져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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