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어네스트 골트가 어느 날 토마스 칼라힐을 찾아와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에 기독교를 대신하는 신선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 것이다.” 이때 칼라힐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당신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의 계획은 헛된 계획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칼라힐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최대 명절 중 하나는 부활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메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강력하게 담겨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서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쓴 당시, 고린도는 교육과 경제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헬라 철학의 본 고장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모든 문제를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니까, 고린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볼 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 신앙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부활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종교마다 종말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불교는 윤회사상을 말하고, 유교는 사후세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확한 답을 주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또한 전도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그래서 인간의 인생은 3생으로 나누어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삼생(三生)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제1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보내는 10개월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는 제2생을 위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에 나오면 제2생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70-80세를 말하지만, 요즘은 의학의 발전으로 90-100세까지 살기도 합니다. 모태에서 보낸 제1생보다 훨씬 긴 기간이지요. 그러나 제2생 또한 제1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2생도 다음 시기인 제3생을 준비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3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보내는 영생(永生)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이 세상에서 10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을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제3생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보내고 있는 제2생을 통해 제3생을 잘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굳건한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유한한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세계에 속한 영생하는 존재임을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 신앙은 고난과 환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실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기록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온갖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며 헐벗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근원적인 힘은 바로 부활의 소망에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어떠했습니까? 부활을 믿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는 부활 신앙과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도,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말씀처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잠이 들었습니다(행7:59). 

또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도 고통 중에 순교했습니다.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기름이 뿌려진 장작더미 위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고, 믿음을 고백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당했습니다. 이때 그는 “주님께서 나를 평생토록 믿고 도와주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반하겠느냐?”라는 고백을 남기고 순교의 길로 향했습니다. 폴리캅이 고통 중에도 순교의 길을 능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확신이 곧 능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이러한 순교는 어리석고 무모한 짓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확실히 믿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우리 인생에 어떠한 고난과 환난이 찾아와도 능히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되어줍니다.

 

셋째, 부활 신앙은 우리를 내세중심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오직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누려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제2생에 모든 것을 걸고, 오직 제2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부활 신앙을 갖게 되면 삶의 방식 또한 달라집니다. 제2생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이유와 필요가 없습니다. 제2생은 제3생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평가는 제2생을 통해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천국에 가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천국에서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 천국을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영어성경(NIV)에서는 이 말씀의 전반부를 “우리는 보이는 것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합니다.”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천국,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시선을 고정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빌3:14).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삶과 최후 승리의 삶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해주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모든 순간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사람들의 무시와 홀대도 이겨냅니다. 부활이 있기에,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지금의 슬픔도 이겨냅니다. 부활이 있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은 우리의 일상을 내세중심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순리이며,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히9:27)는 종말론적인 부활 신앙이 우리의 현세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동안 연연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부질없게 느껴지고(빌3:8), 오늘을 살아갈 때에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한 삶으로 전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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