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원 노역-교통사고 대수술··· 3번째 삶은 주님께”

고1 때 부산 부랑아 시설 끌려가
죽을 고생에 “빼내만 주신다면
평생 하나님 위해 살겠습니다”

고생 끝나나 싶었던 2020년 7월
대형사고 뒤 심근경색-뇌동맥류
3번이나 수술하고 스텐트 시

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러 번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병식 목사(아산 브니엘교회, 58세)는 실제로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다시 살리시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다.

“이곳에서 꺼내만 주시면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김병식 목사가 고1 때 난생처음 한 기도다. 김 목사는 부산에 놀러 갔다가 지갑을 소매치기당해 파출소에 찾아갔는데, 경찰서에서 그를 악명 높은 부산 부랑아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100일을 잡혀있었다.

 

부산 형제원에서 만난 ‘하나님’
“1981년 여름이었어요. 열일곱 살에 형제원에 잡혀갔어요. 거기서는 맞다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어요. 새벽부터 시멘트 20kg, 모래 20kg 들고 산꼭대기로 옮기는 일을 매일 했어요. 못하면 맞아요. 맨날 맞았어요. 더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목숨 걸고 기도한 거에요. 나를 드릴 테니 빼내 달라고.”

당시 김 목사는 하나님이 뭔지도 몰랐지만 새벽기도에 다녀오다 통행금지에 걸려 잡혀 온 전도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말한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정말 기적같이 기도의 응답이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기도했는데 마지막 날에 누나가 형제복지원을 찾아와 100일 만에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과의 약속, ‘목회자의 길로’
그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울신대에 갔다. 신학생 시절엔 1.5평의 작고 불편한 교회 옥탑방에서 살면서 교회 허드렛일도 하며 훈련했다. 졸업 후에는 부교역자로 사역하며 목회 현장을 배웠다. 부교역자의 자리는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담임목사가 나가라면 두말없이 자리를 비워야 했다. 당시 그의 소원은 ‘내 목회’를 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단독목회 시작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저 목회하고 싶어요. 어디든 갈게요”라고 기도했는데, 또 금방 응답이 왔다. 2001년 수도시설도 없던 수철리교회에 성도 4명과 함께 전도사로 첫 단독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년을 사역한 후 목사안수를 받고 2003년 신창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신창교회 12년, 아산으로 이전
장년 성도 10명 남짓 나오는 작은교회였지만  내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부임 후 성도가 점차 늘어나 즐겁게 목회를 했다. 그러다 ‘성전 이전’이 오랜 꿈이었다는 성도들과 마음을 모아 교회 이전을 추진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교회가 세워진 땅이 남의 땅이었다. 교회 부지 소유권을 넘겨받는 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땅주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막상 땅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분란이 생겼다. 목사가 교회 땅 팔아 먹는다는 소문이 났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때 아내가 위암에 걸려서 수술했어요. 분탕질 때문에 성도들이 다 떠나고 2명밖에 남지 않았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어요.”

그래도 12년을 신창교회를 지키며 목회했다. 그러다 신창교회 시대를 마무리하고, 지금의 아산으로 옮겨와 ‘브니엘교회’로 새출발하게 됐다. 이전 예배당 대지 매도금 6000만원에 아내의 암 수술 보험금까지 합쳐 아산시 용화동 도시개발 계획지구에 165.25㎡(50평) 건축용지를 매입했다. 죄다 빚이지만 새로운 시작에 들떠 있었다. 건축비가 없어 건축을 시작하기까지 7년이나 걸렸지만 느림보 걸음으로 꾸준히 걸어갔다. “목회하며 사례비를 10만원 이상 받아본 적이 없어요. 생활은 아내가 과외해서 벌어온 돈으로 하고, 헌금으로는 교회 운영과 이자 내기도 빠듯했죠. 지금도 사례비는 못 받지만 불만은 없어요. 하나님이 굶기지는 않으시더라고요.”

산 브니엘교회 ‘새성전’ 건축
어려운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서 2014년 12% 고금리로 3억 원을 대출받아 건축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 3번이나 부도가 날뻔했지만 어렵게 완공할 수 있었다. 천안교회에서 건축헌금도 주고, 십자가와 간판까지 지원(총 1300만원)해 준 게 큰 힘이 되었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건축면적 534.6㎡(162평) 5층 단독 건물로 브니엘교회가 완공되어 2015년 6월 새성전 입당 예배를 드렸다.

 

새성전 사역의 결신 ‘북카페’ 철거
새성전을 입당하고 나니 목회자와 성도들 모두 신이났다. 전도도 열심히 했다. 점차 성도가 늘어나 30여 명의 성도들과 재미있게 목회하던 어느 날 날벼락 같은 통보가 왔다. 교회 북카페가 불법 건축물이라며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벌금이 5300만원이 나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철거밖에 답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20년 7월 북 카페를 철거했다.

상실감에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김 목사는 철거 직후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2주만 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은 기도한 대로 응답하셨다. 3일 후에 교통사고가 나서 드러눕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 후 심장, 뇌 수술만 4번
김 목사는 신호위반 차량과 교통사고가 났다. 타고 있던 중고 카니발이 2100만원이었는데 수리비가 2000만원이 나올 정도로 큰 사고였다. “사거리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경찰차가 신호를 위반하며 달려와 사고가 났어요. 혼절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검사 결과는 괜찮다는 거에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심근경색이 왔어요.”

김 목사는 교통사고 후 심근경색으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장 수술한 지 한참이 지나도 머리가 계속 아팠다. “의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니 차트를 보더니 ‘뇌동맥류가 있네요. 심장 수술할 때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얘기하는 걸 깜빡했나 봐요’ 하더라고요. 기가 찰 노릇이죠.”

김 목사는 서울 대형종합병원에서 뇌동맥류 수술을 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나도 회복이 잘되지 않아 다시 검사를 했는데 수술하며 세균감염이 생겨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3주를 입원해 항생제 치료를 했으나 낫지 않아 결국 재수술해야 했다. 협심증까지 겹쳐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에 괴로웠을텐데 김 목사는 “교회를 오랫동안 비워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적절하게 채워주셔서 감사했다”고 오히려 감사를 고백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서울 평강교회에서 목회하던 문광호 목사가 내려와서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젊은시절 세현교회에서 부목사와 전도사로 만나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이때부터 다시 브니엘교회에서 동역하고 있다.

 

원망하지 않고, 감사로 고난 이겨내
원망이 쌓여도 당연한 상황인데 김병식 목사는 아니었다. “처음엔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런 고난을 자꾸 주실까 원망도 했었는데 결국은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더 감사하게 만드신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깐 감사합시다” “그럼에도 감사합시다” “그럴수록 감사합시다” “그것까지 감사합시다”

매 주일 브니엘교회 모든 성도들이 예배 전에 외치는 감사의 고백이다. 고난을 많이 겪은 교회지만, 목사와 성도들 모두 작은 것에 감사하며 굳건히 신앙을 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성도가 많이 줄었지만 부족한 건 하나님이 채우실 꺼라는 믿음으로 김병식 목사는 하루하루 그저 성실하게 목회하고 있다. 

붕어빵 전도도 하고, 생활용품을 전도지와 함께 전하며 노방전도도 한다. 당장은 열매가 없어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그저 묵묵히 하나님 길을 걸을 뿐이다. 김 목사의 비전은 소박하다. 지금 이 성전을 은퇴 전까지 봉헌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루시는 주님만 믿고, 어떤 고난이든 헤쳐 나가려고 합니다. 죽을 목숨 여러 번 살려주신 은혜 기억하며 평생 하나님만 위해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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