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내 인생을 모두 바칩니다”
굴곡진 인생, 죽을 자리서 살리신 은혜 ‘감사’

부산 형제원에 끌려가 첫 고비 넘겨
고생하며 예배당 짓고 나니
교통사고와 4번의 수술 닥쳐와
‘부활’의 은혜 체험하고 또 감사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감사'로 이겨낼 수 있다는 김병식 목사(브니엘교회 담임)가 예배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감사'로 이겨낼 수 있다는 김병식 목사(브니엘교회 담임)가 예배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러 번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병식 목사(아산 브니엘교회, 58세)는 실제로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다시 살리시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다.

부산 형제원에서 만난 ‘하나님’
“이곳에서 꺼내만 주시면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김병식 목사가 고1 때 난생처음 한 기도다. 김 목사는 부산에 놀러 갔다가 지갑을 소매치기당해 파출소에 찾아갔는데, 경찰서에서 그를 악명높은 부산 부랑아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100일을 잡혀있었다.
“1981년 여름이었어요.열일곱 살에 형제원에 잡혀가서 맨날 노역하며 얻어맞았어요. 맞다가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어요. 새벽부터 일어나 시멘트 20kg짜리, 모래 20kg 들고 산꼭대기로 옮기는 일을 매일 했어요. 못하면 맞아요. 맨날 맞았어요. 더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목숨걸고 기도한 거에요. 나를 드릴 테니 빼내 달라고.”
당시 김 목사는 하나님이 뭔지도 몰랐지만 새벽기도 다녀오다 통금에 걸려 잡혀 온 전도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말한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정말 기적같이 기도의 응답이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기도했는데 마지막 날에 누나가 형제복지원을 찾아와 100일 만에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과의 약속, ‘목회자의 길로’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학교에 다니는데,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는 고2 때 친구에게 부탁해 난생처음 교회에 갔다. 강진제일성결교회였다. 성결교회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섰고, 고3 때는 목회자가 되려고 서울신대를 지원했는데 낙방했다. 가난도 발목을 잡았다.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서울 2호선 지하철역에서 신문을 팔아 돈을 벌었다. 동생들 뒷바라지해서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한 이후, 6년이 지나서야 서울신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학생 시절엔 1.5평 작고 불편한 교회 옥탑방에서 살면서 교회 허드렛일도 하며 훈련했다. 신학교 졸업 후에는 부교역자로 사역하며 목회 현장을 배웠다. 목회자의 길은 녹록하지 않았다. 부교역자의 자리는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담임목사가 나가라면 두말없이 자리를 비워야 했다. 개척하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데 나중엔 모르는 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단독목회 시작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저 목회하고 싶어요. 어디든 갈게요”라고 기도했는데, 또 금방 응답이 왔다. 2001년 수도시설도 없던 수철리교회에 성도 4명과 함께 전도사로 첫 단독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년을 사역한 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2003년 신창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신창교회 12년, 아산으로 이전
장년 성도 10명 남짓 나오는 작은교회였지만 이제 내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다. 부임 후 성도가 점차 늘어나 즐겁게 목회를 했다. 그러다 ‘성전 이전’이 오랜 꿈이었다는 성도들과 마음을 모아 교회 이전을 추진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교회가 세워진 땅이 남의 땅이었다. 교회 부지 소유권을 넘겨받는 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땅주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막상 땅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분란이 생겼다. 목사가 교회 땅 팔아 먹는다는 소문이 났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때 아내가 위암에 걸려서 수술했어요. 분탕질 때문에 성도들이 다 떠나고 2명밖에 남지 않았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죠.”
그래도 12년을 신창교회를 지키며 목회를 이어갔고, 결국 교회를 아산으로 이전하며 신창교회 시대를 마무리하고, 지금의 ‘브니엘교회’로 새출발하게 됐다. 이전 예배당 255.31㎡(158평) 대지를 매도하니 6000만원이 남았고, 여기에 아내가 암 수술하고 받은 보험금까지 합쳐 아산시 용화동 도시개발 계획지구에 165.25㎡(50평) 건축용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건축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건축은 시작도 못하고 대출이자만 갚는 상황이었다. 
“저는 부임해서 사례비를 10만원 이상 받아본 적이 없어요. 생활은 아내가 과외해서 벌어온 돈으로 하고, 헌금으로는 교회 운영과 이자 내기도 빠듯했죠. 지금도 사례비 못 받지만 불만은 없어요. 하나님이 굶기지는 않으시더라고요.”

아산 브니엘교회 ‘새성전’ 건축
어려운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서 2014년 12% 고금리로 3억 원을 대출받아 건축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 3번이나 부도가 날뻔했지만 어렵게 완공할 수 있었다. 천안교회에서 건축헌금(700만원)도 해주고, 십자가와 간판까지 1300만원 지원해 준 게 큰 힘이 되었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연건축면적 534.6㎡(162평)로 5층 단독 건물로 지금의 브니엘교회가 완공됐고, 준공허가를 받아 2016년 6월 새성전 예배를 드렸다. 
“어려운 시기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새 예배당 문을 활짝 열고 열심히 전도하며 목회했어요. 교회 1층을 북카페로 꾸며서 책도 보고 차도 마시는 동네 사랑방으로 만들고 아내가 무료 영어교실도 운영해 동네 사람들이 참 좋아했어요.”

새성전 사역의 결신 ‘북카페’ 철거
점차 성도들도 늘어나 30여 명 성도들과 재미있게 목회하던 어느 날 날벼락 같은 통보가 왔다. 교회 북카페가 불법 건축물이라며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예배드리기도 어려운 때였는데, 벌금이 5300만원 나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철거밖에 답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20년 7월북 카페를 철거했다.
새 예배당에서 한 모든 사역이 사라지는 것 같은 상실감에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김 목사는 북카페 철거 직후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2주만 쉬게 해주세요.”하고 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은 기도한 대로 응답하셨다. 3일 후에 교통사고가 나서 드러눕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 후 심장, 뇌 수술만 4번
김 목사는 2020년 신호위반 차량과 교통사고가 났다. 당시 탔던 카니발이 2100만원이었는데 수리비가 2000만원이 나올 정도로 큰 사고였다.
“신호 받고 사거리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경찰차가 신호를 위반하며 달려와 사고가 났어요. 혼절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검사 결과는 괜찮다는 거에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심근경색이 왔어요. 교통사고 후유증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선 입증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긴급하게 수술하고 겨우 살았어요. 보상은 못 받았죠.”
김 목사는 사고 후에는 심근경색으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장 수술한 지 한참이 지나도 머리가 계속 아팠다.
“의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니 차트를 보더니 “뇌동맥류가 있네요. 심장 수술할 때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얘기하는 걸 깜빡했나 봐요” 하더라고요. 기가 찰 노릇이죠.”
김 목사는 서울로 올라와 대형 종합 병원에서 뇌동맥류 수술을 했다. 그러나 회복이 잘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부기가 안 빠져 다시 검사를 했는데 수술하며 세균감염 생겨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3주를 입원해 항생제 치료를 했으나 낫지 않아 결국 재수술해야 했다. 협심증까지 겹쳐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에 괴로웠을텐데 김 목사는 “교회를 오랫동안 비워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적절하게 채워주셔서 감사했다”고 오히려 감사를 고백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서울 평강교회에서 목회하다 사임한 문광호 목사가 내려와서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젊은 시절 세현교회에서 같이 부교역자로 섬기며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이때부터 다시 동역하고 있다.

원망보다 감사로 고난 이겨내
솔직히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원망이 쌓여도 당연한 상황인데 김병식 목사는 아니었다. “저도 처음엔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런 고난을 자꾸 주실까 원망도 했었는데 결국은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더 감사하게 만드신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이전보다 더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깐 감사합시다
그럼에도 감사합시다
그럴수록 감사합시다
그것까지 감사합시다”

매 주일 브니엘교회 모든 성도들이 예배 전에 외치는 감사의 고백이다. 작은교회, 고난을 많이 겪은 교회지만, 목사와 성도들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며 굳건히 신앙을 지키고 있다. 여러 고비를 넘긴 김 목사는 지금도 성도들과 직접 전도에 나선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겪으며 여러 번 수술까지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성도가 많이 줄었지만 부족한 건 하나님이 채우실 꺼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그저 성실하게 목회하고 있다. 붕어빵 전도도 하고, 생활용품을 전도지와 함께 전하며 노방전도도 한다. 당장은 열매가 없어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는 그저 묵묵히 하나님을 위한 길을 걸을 뿐이다.

김병식 목사의 비전은 소박하다. 지금 이 성전을 은퇴 전까지 봉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지요. 무엇이든 이루시는 주님만 믿고, 어떤 고난이든 헤쳐 나가려고 합니다. 죽을 목숨 여러 번 살려주신 은혜 기억하며 평생 하나님만 위해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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