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발전기금 모금으로 광주제일교회 사태 막아

남영호 장로는 6.25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성들을 위해 고아원과 모자원을 만들어 불쌍한 동족을 구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바쁘게 일하면서도 자가용 하나 없이 버스와 기차를 타고 전국을 다녔다. 절약을 통해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코자 하였다. 이런 그의 청렴성과 희생적 봉사정신이 김천 뿐 아니라, 경북도 일대에 널리 알려졌다.

1961년 5.16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혼란한 국정과 무질서를 바로 잡고 국가재건 운동을 전개할 때였다.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군사 쿠데타의 이미지 때문에 청렴결백한 인사들을 발탁하려고 했고 남영호 장로를 김천시 재건위원장으로 임명했다. 2년 후에는 그를 경북도 재건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부정부패 방지와 민족 생활개선 향상에 공헌케 하였으며 그는 1970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85년 김천남산교회에서 장남 남철은 집사가 장로장립을 받자 그는 교회에 대한 충성을 장남에게 맡긴 후, 1986년부터 교단의 사회복지재단의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주일 저녁예배를 드린 후 밤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주중에 총회본부에서 일하다 금요일 밤 기차를 타고 김천으로 내려가 교회에 충성했다.

그가 총회본부에 일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정치력과 신앙연륜이 높은 그에게 총무목사는 자문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때로는 개 교회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총무와 동행하여 당사자를 만나 설득하고 승복하게 하는 탁월한 언어와 능력을 구사했다. 그 하나의 예가 교단의 발전기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1987년 교단창립 80주년 행사를 마치자 남영호 장로는 성결회관의 확장을 위해 교단 발전기금을 모금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이 일에는 당시 임철재 총무와 임용희 장로, 그리고 남영호 장로 3인이 시간이 나는 대로, 임 총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전국의 교회와 장로나, 권사들을 만나서 협조를 구했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교단의 발전을 위한다는 한 가지 목표로 노구의 피곤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수고로 근 4년 동안 교단의 발전기금으로 약 20억이 약속되었고, 1991년 4월 총회까지 약 13억 원이 입금되었다. 그 때 광주의 백화점 사건이 터졌다. 광주제일교회가 광주의 도청 앞 금남로의 교회대지에 15층의 백화점을 지어, 4~6층은 교회에서 예배실과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백화점으로 운영하는 권리를 업자에게 15년간 주어, 건축을 몇 년 전부터 추진했다. 그런데 업자가 부도를 내자 할 수 없이 교회에서 백화점 공사를 떠맡아 입주업체를 전세로 모집하여 겨우 완공했다.

그러나 장사가 여의치 않자, 입주측들이 단합하여 전세금 반환소송을 냈다. 법원에서 약 70억의 상환을 명령했으나 교회에서 응하지 않자, 법원에서 경쟁 입찰로 내 놓았다. 응찰자가 없어 70억에서 30억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법원의 차압딱지가 본부인 성결회관과 광주의 여러 성결교회에 붙기 시작했다. 본부와 교회에 사용 불능의 위기가 찾아왔다.

제일교회는 모두 책임을 진다고 총회석상에서 대답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총회에서는 일단 불을 꺼야하겠기에 전세권자들 대표와 몇 차례 협상을 통해 상환금액을 17억으로 합의했다. 그래서 발전기금으로 준비된 전액과 총회본부의 각 국의 금액을 총동원하여 지불, 사태를 원만히 수습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남영호 장로의 선견적 발의로 모금된 교단발전기금이 큰 몫을 한 것이다. 그 후 2000년 10월 남영호 장로는 80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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