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면 말고’식의 유언비어가 인터넷 매체에 넘쳐난다. 사리사욕을 감추지도 않는 놀라운 뱃심으로 황색신문은 폭로성 기사랍시고 마구 휘갈겨댄다. 모두들 교단이 너무 어지럽다고 개탄한다. 그런 현실을 꾸짖는 말(글)이 이제는 나와야하지 않겠냐고 원고를 청탁하면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 젓는다. 괜한 일에 끼어들어 사서 욕먹을 일, 왜 하느냐는 것이다. 교단의 풍토가 그만큼 사나워졌음을 반증하고 있다.

▨… 스탈린 체제하의 소련에 만델리슈텀이란 이름의 시인이 있었다. 이제 소련은 달라진 시대를 맞이하여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임을 스탈린은 호언하였으나 만델리슈텀은 오히려 그 시대가 진실부재의 시대임을 알리는 시를 썼다. 결과는? 당연히 시베리아 수용소군도로 유형이었다. 만델리슈텀은 그곳에서 사망일자도 확인할 수 없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 만델리슈텀이 그곳에서 남긴 어록 하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역사적 운명은 늘 가시밭길이다. 그것은 권력의 탓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무리가 왕왕 그 이름을 머리에 이고 다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증서를 가졌다거나 소설과 시를 쓴다고 해서, 또는 엘리트관료라고 해서 지식인일 수는 없다. 언제나 지식인이 항복하는 시대엔 진정한 자유와 진실은 사라진다.”

▨… 지금까지도 ‘양심의 법관’으로 칭송받는 판사 김홍섭이 쌀을 훔친 아낙네를 재판하기 위해 법정을 지켜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는 아낙네를 재판하는 대신 자신의 죄책을 털어놓았다. 6·25전쟁 당시 쌀배급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받은 일이 있는 자신을 아낙네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세웠던 것이다. 그의 재판은 법에 따른 것이었지만 법관의 양심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 설교자의 자리는 판사보다 더 엄정하게 양심에 기반하고 있음을 모르는 설교자도 있을까. 설교가 지식만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모르는 설교자도 없겠지만, 설교자는 ‘진정한 자유와 진실’을 지켜내야 하는 자리에 있어야 함을 모르는 설교자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교단이 이처럼 어지러운 상황에서 쓴소리가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대에는 세례요한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 시대의 설교는 양심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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