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표가 이해되지 않을 때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 삶에 전개되는 모든 상황이 내가 기대한 것과 정 반대로 흘러갈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이 때 우리는 불평을 그치고 믿음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모든 상황 지나고 보면 그 분의 지혜와 방법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경험한 노예 생활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시작된 애굽에서의 삶이 결국은 노예의 삶으로 전락했습니다. ‘탄식’했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고통하며 ‘신음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출 2장 22~24절의 구조는 그 고통의 극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세심히 돌보셨는지 모릅니다. “… 내가 너희를 돌보아(히. 파코드 파카드티)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출 3:16)에서 보듯이 ‘돌보다’의 부정사 형태와 완료태를 동시에 사용하는 독특한 히브리식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왔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을 드러냅니다. 출애굽기는 야곱의 후손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소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출 1장 7절에서 “[그들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됨으로써 창세기의 ‘… 큰 민족을 이루고 …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창 12:2; 26:4; 28:3)는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어떤 이는 왜 굳이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셨으며 또한 그들이 왜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상황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 당시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토착민 중에는 매우 강력한 족속 중 하나인 헷 족속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애굽으로 내려갈 당시 야곱의 가족은 기껏해야 7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그들이 애굽 땅에서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번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애굽 백성으로부터 존귀함을 받았다면 그들의 순수성은 통혼을 통해 무너졌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애굽인들에게 노예 취급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거나 고통을 통한 심판이라기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언약의 성취라는 특별한 섭리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업은 망해 버리고 몸은 중병에 걸리고 모든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마치 하나님이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때 반드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함과 그 분의 시간표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영성은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따라서 영성의 깊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신뢰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하나님은 당신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다만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하심으로 당신을 순전케 하길 원하실 뿐입니다. 그 분을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은 침묵이 아니라 응답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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