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 입학과 총학생회장

故 임종렬 목사
故 임종렬 목사

임종렬은 부지런히 상록생활을 거의 6년 동안 했다. 군인의 정신으로 했으며 그 결과 눈에 띄도록 농촌마을이 갈수록 달라지는 모습에 큰 보람도 있었다. 그는 그동안 군대에서 가끔 나가던 교회가 생각나서 주일이면 읍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어서 그는 밤 예배에만 참석했다. 그때 부흥강사가 인생의 최대 목표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고, 남은 생애를 슈바이처처럼 인류 구원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는 죄와 구원에 대한 말씀에 큰 감동 받고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세례 받을 것을 권할 때마다 다음에 받겠다고 기피했는데, 은혜 받고 회개했으니 마음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왔다. 교회의 세례 기간이 되자, 그는 자원해서 이준목 담임목사의 집례로 세례 받은게 1964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왔다. 

어느 날 기독교방송에서 특집으로 슈바이쳐 박사에 대해서 방송했다. 슈바이쳐는 독일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철학, 음악박사 학위를 딴 대학 교수로 누구나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보람찬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신문에 아프리카의 콩고지역에 병원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약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죽어간다며, 긴급 의료선교사를 요청했다. 슈바이쳐는 “바로 나를 부르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곧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아내는 간호학과를 지원했으며, 몇 년 후 의사와 간호사로 콩고에 파견되어 평생을 흑인들을 위해 무료치료로 봉사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큰 감동을 받았지만 의과대학은 못 가고 신학대학에는 갈 수 있을까 하여 담임목사와 상의했다. 담임 목사는 30세가 넘은 나이에 갈 수 있는 학교는 서울신학교가 있는데, 이제는 수준 있는 신학대학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와 성경을 읽으면서 입시를 준비했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4명이나 있는데, 만약 그가 합격한다면 4년 동안 가족들의 부양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러나 그는 철야기도를 감행하면서 믿음의 결단을 했다. + 이듬해 1965년 2월 19일, 서울 아현동에 있는 서울신학대학 입시 발표일이다. 경쟁률이 1.5:1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합격하였다. 매일 6시에 강당에서 사감 목사가 인도하는 새벽기도회로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신학대학은 철저한 성경연구와 경건훈련의 도장이었다.

어느새 신학 3학년 가을학기가 되자, 총학생회 임원 선거가 있었다. 그는 학생들 중 최고령인데다 군대에서 다진 지도력이 있어, 친구들의 적극 권면에 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여 상대를 물리치고 당선했다. 그는 임원회를 구성하여 학교 발전에 다음과 같이 공헌했다.

1. 친선배구대회 개최: 1961년에 분열된 예성신학교 학생과의 친선 대회였다.

2. 학생 시화전 개최: 학생들의 신앙을 시화로 표현한 은혜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3. 교내 설교대회 개최: 전통적인 행사로 우수한 설교자의 개발에 의미가 있었다.

4. 4중창단 조직: 음악성이 뛰어난 4명을 선발, 방학 중 전국교회를 순회했다.

그는 4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생회장을 후배에게 인계하였다. 그런데 그가 나이가 있어 목회해야한다면서 충청도 출신 같은 반 학생의 소개로 가을학기부터 주일마다 충남 공주의 광정교회 임시 담임전도사로 청빙을 받아 토요일마다 가서 목회하기를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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