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도편수’가 지은 한옥교회··· 126년 전 교적부···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100년전 공과 교재-목사 일기장에
1890년 영국서 가져온 종 등 전시

동서양 공존 강화읍교회
겉은 사찰, 내부는 ‘바실리카’ 
곳곳에 한시로 옮긴 핵심교리

강화도에는 아름다운 건축미와 토착화를 보여주는 교회당이 있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이 공존하는 곳도 있다. 함께 강화로,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를 떠나보자.

한교총(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이 인천 강화의 대표적인 기독교 문화유산을 집약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일정을 안내했다. 허은철 교수(총신대 역사교육과)는 “기독교 유산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강화에는 기독교 문화의 유지 보존을 위한 모델로 삼을만한 곳이 있다”라며 대표적인 장소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과 성공회 강화읍 교회를 들었다. 두 곳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들르기 좋은 문화유적을 함께 소개한다.

 

기독교역사기념관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무수한 강화인들의 죽음과 한이 묻힌 매장지에 강화군 기독교 역사를 집대성한 역사기념관이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다. 강화의 입구에 기독교 기념관이 세워진단 사실에 핍박이 쏟아졌지만 이겨내고 2022년 3월에 개관했다.

관장 최훈철 목사는 “이곳은 전쟁을 거치며 많은 죽음이 있고 무속 행위가 끊이지 않던 저주의 땅이었다. 우리 민족이 처절하게 고통당할 때 가장 먼저 외세로부터 고통받던 지점, 강화인들의  한이 묻혀 있는 매장지였다”라며 “이 죽음과 저주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자는 다짐으로 기념관 위치를 이곳으로 정했다”라고 밝혔다.

강화대교 건너 바로 있는 이 지역은 ‘깊은 협곡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역사적 부침을 겪어야 했다. 1892년 첫 발을 디딘 존스 선교사는 강화유수에 의해 입도를 거절당했지만 이후 1893년 성공회 신부는 통제영학당이라는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터를 이용해 강화에 들어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기념관 로비에는 300년~40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종 하나가 놓여 있다. 1890년 영국에서 사용하던 종을 영국 신부가 들여왔다. 태평양 전쟁시 일본에 이 쇠붙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교인들은 교회 마룻장을 뜯고 그 속에 종을 감춰두었다. 민족의 수난과 슬픔을 알고 있는 ‘기억의 종’이다. 목숨을 걸고 지킨 신앙. 종소리의 울림에 따라 옛 교회의 예배 타종을 기억하는 노(老)성도들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기념관 로비를 지나 전시관 배치 순서에 따라 발길을 옮기면 강화에 처음 발 들인 선교사들의 삶으로부터 강화 복음화 경로를 이해하고 감리교와 성공회 초기 선교의 맥을 잡을 수 있다. 

1층에는 강화도 출신 성공회 조광원 신부의 대례복과 1870년 영국 해군이 사용하던 인쇄기, 110년 넘은 성경과 1930년대 목사의 일기장, 1922년 주일학교 공과가 그대로 보존돼있다. 보존 문화가 강한 성공회의 덕을 본다.

2층으로 올라가 교산교회와 성공회 강화읍교회로 시작된 강화 기독교의 전파 과정과 이동휘, 박두성 등 인물 자료를 통해 기독교의 근대사적 가치와 시대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성결인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김만효 전도사의 기록도 남아 있어 반갑다. 강화 양반·지식인들은 개화와 국권 수호의 한 방편으로 기독교를 접했다. 민중은 평등과 민족 수호를 위해 믿기 시작했다. 어둠 속 등불처럼 일한 인물 이야기가 전시실을 관통한다.

최훈철 목사가 ‘기념관에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문서’로 꼽은 것은 1897년 건평교회가 세워지며 사용하기 시작한 교적부. 현존하는 강화의 가장 오래된 사료이자 선교사들이 붙인 남녀 평등의 불씨다. 이 교적부에는 당시 16세 새댁에게 세례를 주며 그 이름과 함께 정체성을 주었고, 이로써 미래 여성 지도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강화 기독교 역사 순례길 1~7코스를 소개하는 다음 전시관을 지나면 이제 관람길은 막바지에 이른다. 방문객들은 기념관을 나서며 가슴에 무엇을 새기고 나올까.

척박한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추위와 핍박을 견디며 오로지 복음 선교를 위해 목숨 바친 역사를 둘러보고 지금의 한국 교회 현실을 떠올릴때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드는 찰나, 캄캄한 기념관 벽에 조용한 기도문이 떠올랐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에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소설『양화진에 등장하는 정현희 권사의 자전적 고백이다. 이 땅에 잠든 선교사들의 마음을 담아 기록한 기도문을 따라 읽으며 캄캄한 복도를 통과하면, 강화 기독교역사기념관의 관람이 잠잠하게 마무리 된다.

 

❖ 추가 코스 기념관을 나와 근처 갑곶돈대를 둘러보고 진무영순교성지로 이동한다.
갑곶나루는 1892년 존스 선교사가 섬 입도를 거부당한 바로 그 곳이다. 갑곶돈대에서 초기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강화의 관문 갑곳나루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훌륭한 바다뷰를 즐길수 있다. 잠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보자.

강화성당 내부에 있는 진무영순교성지는 다음 목적지인 강화읍교회 근처에 있다. 진무영은 조선시대 해상 경비 임무를 맡았던 곳인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였다. 1868년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등 천주교 신자가 이곳에서 처형됐다.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전, 조양방직 카페에서 쉬어간다. 1937년 설립된 방직공장을 개조해 만든 독특한 도시재생 카페로 적산가옥 3~4점을 그대로 활용해 짓고 각종 골동품으로 가득 채운 미술관 카페다. 이젠 강화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은 곳이다.

“승려들이 합장하며 지나가는 한옥교회”
궁궐같이 화려한 한옥 기와집으로 들어가니 이게 웬걸, 마당 입구에 보리수나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상징이다. 혹시 이곳은 불교 사찰인가 싶다. 

돌계단을 넘어 예배당에 들어서면 더욱 기가 찬다. 내부 구조가 유럽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바실리카 양식이다. 건물 곳곳에 한자가 새겨져 있다. 창조론부터 삼위일체 선교론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5개의 한시로 적은 것이다. 더 걸어 들어가면 천주교 성당에서 쓰는 성물, 지성소, 재단이 붉은 목재 구조물과 함께 보여 아름답다는 생각과 동시에 호기심이 크게 든다.

외관 탓에 앞을 지나는 승려들이 합장하며 지난다는 이곳은 불교와 유교, 천주교, 기독교 문화가 다양하게 혼합돼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성공회 강화읍교회, 사적 제424호다.

올해로 123년 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이자 이후 지어진 한옥 교회 건축물들의 모델 역할을 했다. 문화적 격동기를 겪어낸 당시 선조들의 혼란스러운 정체성과 다양한 종교의 융합을 두 눈으로 직관하며 3차원으로 경험할 수 있다. 외래종교인 성공회가 전통 민족 신앙과 충돌 없이 토착화한 상징적인 건물이기 때문이다.

강화읍교회에서 시무하는 이경래 베드로 신부는 “전주에 있던 최초의 한옥 교회가 한국전쟁 때 안타깝게 폭탄을 맞아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곳은 그런 피해를 보지 않아 원형 그대로 보존, 2001년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준비 중이다”라며 강화읍교회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설명했다.

이 신부에 따르면, 강화도가 마치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한 영국 사람들은 강화를 선교 본부라 여기고 그에 걸맞은 계획을 세웠다. 개교된 지 2년도 안 된 해군사관학교가 폐교하면서 영국 교관들은 영국 선교사에게 땅을 팔았고, 이를 대한성공회가 매입하여 1899년 영국 지원금을 받아 성전을 짓기 시작해 1900년 완성했다.

경복궁 중건을 했던 도편수를 채용해 우리나라 궁궐 같은 스타일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한옥은 일반적으로 단층이었던데 반해 이 건물은 복층으로 짓고 2층 위치에 창틀을 넣으면서 높은 천장고가 만들어졌다.

당시 신자들은 기독교 교회 건물을 본 경험이 없었다. 중국에 있을 때 교회 에배당을 지은 경험이 있는 인천의 중국인 석공들을 써서 세례대와 제단을 돌로 만들었다. 교회 건물을 지은 적 없던 당시 기술로는 스테인드글라스도 만들 수 없었다. 단순한 창문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거룩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물 곳곳에 한자들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게다가 예배당의 문은 영국 국기와 같은 십자가 모양의 유니언잭 형태인데, 영국에서 직접 가져와 달았다.

한옥 안에는 회랑과 기둥, 정면에 지성소가 있는데, 목재 기둥은 서해 바다 뗏목으로 가져온 백두산 적송으로 세웠다. 이제는 남한에서 찾아보기 힘든 백두산 목재로 지은 건물이 그렇게 탄생했다.

1893년 강화도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성공회의 성전. 1900년 11월 15일 축성돼 강화도 선교 시작한 지 7년 만에 축전되어 이제 2년 후의 12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라는 성공회 강화읍교회에서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기독교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 추가 코스 강화읍교회에 이어 홍의교회와 교산교회를 추가로 둘러볼 수 있다. 
홍의교회는 1896년 강화도에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인데, 성도들이 흰옷에 물을 들여 검은 옷을 입고 ‘믿음 안에 하나’라는 의미로 이름 돌림자를 한 일(-)자로 통일해 개명하는 개명 운동으로 유명하다. 강화읍교회 건축물이 건물로써 복음의 토착화를 추구했다면 홍의교회는 문화양식의 토착화로 볼 수 있다.

교산교회는 강화 입도를 거절당한 존스 선교사가 배 위에서 세례를 주어 강화 최초 세례자를 배출한 후 그로 인해 세워진 강화 최초 신앙공동체였다. 인천 내리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모친을 위해 선상세례를 감행한 첫 마음을 교산교회에서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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