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한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까요?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3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네 번째부터는 복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칭찬하시지 않고,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라는 표현은 무제한을 의미합니다. 숫자에 의미가 없습니다. 완전 수인 7과 70의 곱셈은 결국 제한 없이 계속 용서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고 자유인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용서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너무 큰 용서를 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죄를 짓고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다시 회복되고 구원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죄짓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서로의 용서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또한 용서하지 않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죽어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용서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보자면, 용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고,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한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리고 회복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서에 담긴 비밀입니다.

  셋째,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용서를 하고 안 하는 것이 사단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2장 10~11절을 보면,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사단의 계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는 행위이고, 사단의 계책에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용서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용서를 기독교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 당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주기도문의 한 대목에서도 이런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초기 한국 교회사에 등장하는 손양원 목사(1902~1950) 이야기는 전설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은 탓인지 기독교인들은 용서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자주 말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만 달란트를 빚진자가 탕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용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늘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고 성령 충만한 상태, 즉 은혜가 넘치는 상태에서 성전을 올라가다가 비로소 그 영혼의 불쌍함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옵션이 아닙니다. 반드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내가 살고, 세상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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