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꿈꾸는 교회, 생존을 꿈꾸는 교회
주말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딧불이 교회’

모든 교회는 부흥(revival)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생존(survival)을 꿈꾼다. 개척 3년 안에 자립하지 못하면 평생 미자립 교회가 된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그럴 줄 몰랐고, 미자립 교회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는 욕심이라고 했다. 현실을 보라고 했다. 그래도 버티고 싶었다. 교회를 살리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글쎄? 지금부터 생각해볼 참이다.

평생,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 적이 없다. 평범한 삶이 꿈이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지만 내가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제는 하나님은 늘 우리를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나 그런 사람 아니라구요, 내가 감당할 만한 시험과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에는 엄청 큰 차이가 있어요. 동명이인인지 아닌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는 잘 안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딸을 선물로 주셨다. 아빠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짧은 순간동안 행복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2시간 뒤에 큰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에 앉아 있었다.  매일 다니는 길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외국 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태어날 때, 다들 고생도 하니까 심각하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백일이 되었을 때 청각 장애 판정을 받았다. 백일 잔치, 돌 잔치 해 본적 없고, 아이와 엄마는 병원에서 만날 때가 많았다. 아이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며 ‘이 호텔 멋진데? 우리가 어디 놀러갔었나?’ 아내와 함께 궁금할 때가 있었다. 곧 서로 쳐다보고 ‘아, 병원 로비구나!’했다. 

‘슬프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말인지 몰랐다. 옆 테이블에서 “야,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라고 핀잔을 주는 아이 엄마의 소리에 울컥해서 식당을 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부모들은 신발을 살 때, 아기들은 금방 크니까 몇 번 못 신으면 아깝지 않을까 고민한다. 우리는 이 신발을 신고 우리 딸이 걸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청각장애에 고관절 탈구, 의사가 청각에 이상이 있으면 혹시 못 걸을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병원에 가는 것이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죄송했다.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 주셨다. 병원비 없을까봐 다들 힘들면서도 도와주셨다. 믿음 안에서 진짜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더 이상 교회의 부담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찬양인도도 할 줄 알고, 방송실 장비도 다룰 줄 아는 일당백 하는 목회자도 차고 넘치는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진 나를 부목사로 청빙해 줄 교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정말 응답해 주시나? 응답해 주시더라. 뜬금 없이 미국 애틀랜타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 들어 보기는 했지만 애틀랜타가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프리카도 있는데 왜 꼭 그런 기도 응답은 미국 같은 좋은데냐고, 가시밭길을 간다고 하면서 왜 맨날 목사님들은 큰 교회로만 옮기시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냥 응답 받은 죄 밖에 없다. 그건 하나님께 물을 일이다.

미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은 유학생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별별 일이 많았지만 어쨌든 미국에 갔다. 애틀랜타로 바로 가지는 못하고 L.A로 가게 되었다. 태평양 끝인 L.A.에서 대서양의 끝인 애틀랜타까지의 거리는 약2,200마일(3,540km)이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는데, 백성들을 런던까지 데리고 가는 대충 기도 응답인 건가(이집트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직선거리는 2182마일, 3511km)? 하여튼 거기도 미국이니까 찬밥 더운 밥 가릴 형편이 아니어서 일단은 순종하고 갔다. 

미국에 가서 느낀 것은, 여기 있는 한인들은 한국말 하는 미국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와 정서가 같으면서도 좀 이상한 느낌? 말도 통하고 감정도 같고, 경험도 같은데 끝에서는 어, 좀 아닌 거 같은데? 하는 그런 느낌.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만나는 성도들은 한국에서 목회하던 성도와는 달랐고, 목회자를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달랐다. L.A에서의 생활은 미국에서 살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기분이었다. 

미국온지 일년 남짓 겨우 교통 표지판이나 읽고 혼자 식당에서 음식시킬 정도 되었을 때, 다시 애틀랜타로 가라는 소명이 들려왔다. 물론 청빙해 줄 교회는 없었고 가면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개척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사람들이 교회 개척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기에 아는 사람 있느냐? 생활은 어떻게 할거냐? 무모한 것은 순종도 용기도 아니라’는 말들 뿐이었다. 

그래도 담임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면 가야지” 하시며 두말없이 허락하고 격려해 주셨다. 모든 사람이 반대하고 걱정할 때 힘을 주시는 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도 누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면 무조건 축하해 준다. 안되는 백 가지, 천 가지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척하는 그 마음은 마땅히 격려 받고 축하받을 일이다.  

 

광야같은 개척목회, 모세의 마음으로
자동차에 짐을 다 싣고, 집 얻어 줄 한인 부동산하시는 분 전화번호 하나만 가지고 며칠을 운전해서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만나는 끊어지고 앞에 있는 건 전쟁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 개척 전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급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제적 어려움은 골리앗과 같았다. 숨만 쉬고 있어도 죄짓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월세 낼 날은 다가왔고, 오는 편지라곤 모두 빨간색 글씨의 각종 고지서 독촉장뿐이었다. 

자동차 기름을 넣으면 일주일 동안 갈 수 있는 거리가 계산되었다. 새벽기도를 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학교에 보낼 것인가? 두 개를 같이 할 돈이 없었다. 사르밧 여인의 기적을 꿈꾸며 자동차에 안수하며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해 보았다. 한 가지 사소한 문제만 빼면 기도는 성공적이었다. 깜빡이는 주유등은 하나님의 확실한 기도 응답이었다. “너는 엘리야가 아니다!” 

개척한 교회는 초기 3년 동안 6번이나 이사를 했다. 말이 좋아 이사지 쫓겨난 것과 다름없었다.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고 장막을 옮기는 모세의 기분이 이랬을까? 모세보다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었다. 다만, 목사는 모세같이 보여야 하니까 아닌 척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척했다. 목회하다 보면 연기력만 느는 것 같다.

 

어느 날, 처음 만난 다른 교회 성도와 이야기하다가 충격을 받고 낙심하게 되었다. 나를 타겟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 얘기였다. 

애틀랜타에는 ‘반딧불이’같은 교회가 많다고 했다. 불법 부착물을 단속하는 공무원들이 퇴근한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에 잠깐 교회 팻말을 집 앞이나 작은 사무실 한 켠에 붙였다가 월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떼어 버리는 교회들. 그런 교회들을 반짝하고 주말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딧불이 교회’라고 했다. 자기 교회는 정식으로 종교 부지에서 교회 허가를 받고 예배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아냐고, 그런데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불법을 저지르며 교회를 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바퀴벌레 교회라고 안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가? 반딧불이 교회, 이제 들으니 조금 낭만적이다.

그 때는 정말 큰 충격이었다. 비참한 경험을 하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믿음의 끈이 가위로 잘리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헌신이 오히려 정상적인(합법적인) 교회를 훼방하는 일이라니? 내가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의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기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기도 응답 잘 못 받은 건가? 진짜 내 욕심으로 안되는 교회를 지금까지 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 때 하나님께서 한 마디 하셨고,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도 불법을 행하였다.” 

한밤에 등대는 아니더라도, 반딧불이처럼 한번이라도 예수님의 빛을 깜빡거리고 싶었다. 그 초라한 빛을 하나님이 보신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목회를 소명으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취미로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누가 보면 불경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목회가 취미처럼 재미있어졌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취미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누가 거기에 쓸데없이 돈 쓴다고 타박해도, 지금까지 뭐가 늘었냐고 답답해해도, ‘어? 조금 바꿨는데, 조금 달라졌는데 못 느끼나?’ 나만 아는 기쁨이 생겼다. 

개척 16년, 목사 안수 20년.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도 아니고, 독촉 고지서가 끊긴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딸의 장애를 치유 받은 것도 아니다. 아직도 평범을 꿈꾸지만 여전히 평범하게 살지는 못한다. 뭔 문제가 그리 많은지, 예수님 오시면 다 해결될 문제지만 예수님이 안 오시니 할 수 없이 끌어안고 끙끙거리고 있다. 

내 기억에는 새로 등록하는 성도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여전히 성도들은 남아있고 함께 예배 드리고 있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역시 하나님의 일은 계산기 두드리며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밤을 환히 밝히는 달 같은 교회도 만드셨지만(revival), 가끔 달 안 뜨는 밤에 반짝하는 반딧불이 같은 교회도 만드신 줄 믿는다. 시골 길에 반딧불이 하나 없으면 얼마나 삭막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든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살아있는(survival) 것이다. 한국과 미국과 세상에 이 반딧불이 같은 교회의 소명이 꺼지지 않기를 소원한다. 반딧불이 교회가 솔로몬 성전은 아니어도 아둘람 굴이라도 되기를 원한다. 400명 모였던 아둘람 굴보다는 훨씬 적겠지만, 어쨌든 그런 피난처 말이다. 그 굴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되고자 오늘도 취미생활 시작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