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59
길거리 구두수선

 

오태상 목사가 11개월의 조사를 끝내고 기소유예되어 집에 돌아오니 세상이 많이 변해 있었다. 교회는 해산되어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도 쓸쓸하고 마음 아팠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있다. 교회 해산으로 흩어진 신자들이 오 목사 가족의 생활을 돌봐주어 큰 고생 없이 지내도록 해줬다.

어느 날, 오 목사를 11개월이나 심문하던 형사부장이 찾아와 겸허한 자세로 앉아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형사직업을 그만두었다고 고백한 후 기도해 주기를 원한다.

오 목사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오 주여, 저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소서!” 그가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지나간 모든 고생보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감사해서 기쁨의 눈물이 흐른다.

오 목사는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일본인 교회로 보내주었다. 그는 경찰의 주선으로 토목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당국의 감시가 심했고 그 회사의 박봉으로 많은 식구를 먹일 길이 막막했다. 오 목사는 온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무슨 수가 없을까 하고 찾아다녔다.

때는 전시여서 모든 물자가 모자라 수선이 성행하고 있었다. 노변에서 구두 수선공을 보고 세기의 부흥사 무디(Moody) 선생이 했던 구두를 수선하는 직업을 택하기로 했다. 과연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일이 잘되었다. 많은 식구의 양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오 목사처럼 불령선인으로 감시받는 사람에게 좋은 직업이었다. 그것을 본 몇몇 동료들도 구두수선을 해서 궁색을 면했고 신자 중에도 구두수선으로 곧잘 생계를 유지했다. 전쟁은 점점 치열해 B29 폭격기가 매일 일본의 도쿄 오사카 교토 나고야 히로시마 등 계속 일본 도시 전역을 위압했다. 그 폭격이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도시를 시급히 벗어나야 했다. 3월 어느 날 그가 살던 도요하시(豊橋)를 떠나 나가노 산중으로 숨어들어 얼마 동안 안전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시자가 산중까지 찾아와서 집요하게 감시를 이어간다. 일본 경찰 감시체계의 철저함을 새삼 깨달았다.

아!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3,000만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이 찾아왔다.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을 멸시하던 태도가 달라져 친절하게 대한다. 대로에서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외치고 싶지만, 사방에 일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 앞에서 대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집에서 가족끼리만 기뻐했다. 11월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니 이 어쩐 일인가? 해방 민족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곳곳에 술집이고 싸움판이고 길바닥에는 담배꽁초며 쓰레기가 즐비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혼잡한 아수라장이다. 그 모습을 보니 그들의 모습을 누가 해방된 자유 민족으로 보겠는가? 한숨이 나온다. 간신히 배를 타고 모국 부산항에서 내리니 길 좌우에 술장사가 즐비했고 길바닥엔 담배꽁초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그때 그 실망과 불쾌감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이처럼 고국의 첫걸음부터 실망이 너무 컸으나 복음 사역에 대한 사명의 불이 뜨겁게 달아올라 조국의 새 희망 축복을 간구했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당시에는 모두 생활이 어렵던 때였다. 슬하에 7남매로 9식구의 대가족인 오 목사를 청빙하는 교회가 없었다. 오 목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비량 목회를 결심했다. 인천의 어느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침술을 익혀 생활비와 자녀교육비를 감당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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