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은 목사(전 총회장 · 성락성결교회)
지형은 목사(전 총회장 · 성락성결교회)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철저한 비움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하늘 아버지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채우셨고, 이로써  생명의 길이 열렸다

삶이 뒤숭숭하다. 어느 개인이 느끼는 소회가 아니다. 21세기 인류가 사는 객관적인 정황이 그렇다. 푸틴이 저지른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상의 유럽 전쟁이다. 경제 정치 등의 여파를 생각하면 세계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된 핵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기후 위기로 발생하는 재난은 요즘 집 앞의 일이다. 뉴스에서나 보는 혹독한 기상 이변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다는 불안감이 상존한다. ‘챗지피티’(ChatGPT)가 온통 얘깃거리다. 영화에서 본 인공지능이 현실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늘하다. 인공지능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최첨단 버전 출시를 연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는 뉴스에 가슴이 더 섬뜩하다. 

코로나19가 올해 중에 계절성 풍토병으로 마무리된다니 참 고맙다. 그러나 문명사적 전환기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이 전염병의 파장은 가늠하기 힘들다. 

국내의 정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도를 넘은지 오래다. 한반도와 양안 관계 등 동아시아 상황이 무섭다. 미중의 패권 갈등에서 예외인 지역과 영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와중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다. 삶이 힘겹고 불안할 때 교회는 늘 평화와 희망을 선포해 왔는데 지금은 어떤가. 세계 교회가 충분히 목소리를 내며 일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처지와 현실은 보수든 진보든 자기 추스르기에 힘겨운 상황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난주간의 첫날 가만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깨닫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2000년 전의 상황도 그랬다. 온통 뒤숭숭했다. 유대인이 연중 예루살렘에 가장 많이 모이는 유월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화제의 중심인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됐다. 상황을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안식일에는 잠잠했다. 태풍의 핵처럼 종교 권력자들이 바짝 긴장했고 로마 총독도 어느 정도 그랬다. 안식 후 첫날, 꽤 많은 사람이 바랐을 어떤 소요나 사건은 없었다. 다만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어떤 사건 소식이 사람들 귀에 들렸다.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처음에는 조용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격한 강물처럼 확산됐다. 예수가 부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질은 같다. 인간 삶은 이기적인 탐욕과 끝 모르는 소유욕으로 가득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광란의 춤을 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죽음과 부활은 이런 현실을 뒤집는 하나님의 개입이다. 초기 기독교의 오랜 전승은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찬양한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높이신 사건을 말씀한다. 자기 비움의 심장이 죽음이요, 높이심의 중심이 부활과 승천이다. 

이 메시지를 비움, 채움, 나눔으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처절하고 철저한 비움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하늘 아버지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채우셨고 이로써 죄와 죽음의 권세가 꺾이고 생명의 길이 열렸다. 에베소서 4장 8절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고 증언한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게 됐다.

뒤숭숭한 삶은 교회에게 적합한 시공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부활의 증언인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힘으로 인격과 일상의 변화를 체험하고 그 힘으로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증인들이다. 

비움, 채움, 나눔이 부활의 논법이다. 이 거룩한 논리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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