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54
감옥에 핀 장미꽃!

오태상 목사는 1901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주님을 영접하여 1921년 세례받고 1926년 문남조와 결혼했다. 1934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37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오 목사가 1943년 6월 26일, 일본 아이찌겐(愛知縣) 나고야의 이웃 도시 도요하시(豊橋)교회에서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2층 서재에서 성경 읽고 있을 때였다. 요란한 구두 발소리가 나기에 내려가니 특별고등경찰과 형사들이 구인장을 제시하고 경찰서로 연행했다.

  유치장 문전에서 그가 지닌 모든 끈을 압수하고 지문을 찍고 의치의 유무를 조사한 후 감금했다. 감방은 고작 다다미 3장 방인데 신입자의 지정석인 듯 악취 풍기는 변기통 옆자리였다. 기도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인상이 사나운 수감자 7명이 오 목사를 주시한다. 갑자기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 착잡한 심정이었다. 

저녁 도시락이 들어오는데 거친 콩밥으로 도저히 먹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옆에 있는 선배들은 서로 먹겠다고 혈안이 된 한심한 광경이다. 그러나 오 목사도 불과 사흘 후에 그러한 꼴이 된다. 두 달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 무슨 이유로 구속되었는지 초조하고 답답했다. 3개월이 지나 호출해서 나가는데 2층을 오르내리기가 곤란할 만큼 쇠약해졌다. 

심문할 자료가 없어서였는지 도쿄에서 심문한 사본으로 심문한다. 심문은 주로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는가? 천황도 심판받는가? 헌금과 교회부흥운동은 유대왕국 건설촉진인가?” 같은 내용을 11개월이나 계속 위협과 회유로 괴롭힌다. 

일본은 천황을 일본의 국신 아마테라스 혈통이라 주장하며 그를 신으로 숭배했다. 재림, 천년왕국의 교리와 헌금행위는 천황에 대한 신성모독, 일본국가체제 위반죄로 엄벌했다. 재림을 신봉하는 한국성결교회의 교역자와 평신도 300여 명을 검거하여 한국교회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명직 목사는 예수 재림교리에 대해 심문받을 때 끝끝내 “천황은 인간이요 예수는 신으로 재림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서에 따라 심문한 후 강제 해산시켰다.     

어느 날, “너희 가족과 신도 모두가 신앙을 버렸고 교회는 해산당한다. 당신만 믿음을 고집한다면 어리석은 일 아닌가? 국가의 뜻을 따라 신앙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현명하지 않은가?”고 회유할 때 심신이 매우 피로했다. 오 목사는 강압적인 심문보다 배고플 때 음식 주고, 이발해주고 함께 산책하며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그럴싸한 말로 설득시키려 할 때가 견디기 더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는 위압적인 수사보다 그럴싸한 조건으로 전향시키려 할 때 신앙 지키기가 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은 돼지가 일사병으로 죽을 정도로 유난히 무더웠다. 화덕처럼 무더운 유치장의 악취 나는 변기통 옆에서 견디기 버거운 시련이었다. 그러나 성결교회 목사라는 이유로 받는 박해이기에 오히려 평안하고 감사했다. 차마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유치장 느낌이 들지 않고 복음 전도의 장으로 생각되었다. 오 목사는 수감자를 위로하며 복음 전하고 상담하니, 감방에 훈훈한 분위기가 돌았다. 

감방에서 함께 있다가 나갈 때 그들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출옥 후 오 목사의 집에 찾아가서 신세를 졌노라고 인사한 사람도 있었다. 참된 신앙생활은 황무지 같은 살벌한 감옥에도 장미꽃을 피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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