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 18)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포의 중심 역시 십자가와 부활인데 본문은 십자가에 대한 선언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포기하였으면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는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이길래 사도 바울은 이토록 철저하게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전파하였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되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비극입니다. 생명보다 고귀한 것은 없으며 생명을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장(戰場)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데 전쟁을 경험한 분들은 한결같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처절함,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반인륜적인 무자비한 살상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프랑스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단두대는 사람을 사형시킬 때 단번에, 깔끔하게 죽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어가는 자에게 일말의 자비도 허용되지 않는 사형 집행법입니다. 사형수에게 모진 채찍이 가해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야하고, 발가벗겨진 후에 비웃음과 조롱 가운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힌 채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극한의 고통을 맛보며 서서히 죽어가야 합니다. 가장 수치스럽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속에서 가장 참혹하고 처절하게 죽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십자가형이 금지되었고, 반역자나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만 십자가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며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인데 왜 그토록 처절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었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찬송가 303장).

현대에 접어들면서,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부인하거나 희석시키는 학문과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기적과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며, 천국과 지옥을 상징적인 것으로 보고, 성경의 많은 부분을 신화로 치부합니다.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이론과 사상들을 단호히 배격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은 모든 죄인을 향하여 자비로 흐르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살아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6:14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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