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 신앙

故 이용신 목사(서호교회 원로)
故 이용신 목사(서호교회 원로)

이용신 집사는 며칠 동안 수차례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한밤중에 경찰서 5호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죄목은 일정시대에 교원 노릇을 한 것과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5호 감방의 철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밖으로부터 잠겨질 때 그는 비로소 주를 위해 갇힌 몸이 된 영광스러움을 느꼈다. 마음이 평온했다. 

감방에는 그의 지인 곽 목사와 송 장로가 있었다. 그들은 가죽만 남은 미라와 같은 파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화평함이 있고 옥중의 성도답게 거룩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가 앉을 곳은 변기 뚜껑이었다. 좁은 감방에 삼십 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수용하였으므로 도무지 앉아있기에도 비좁았다.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 비좁아서 누울 수가 없었다.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웠다. 살과 살이 닿으면 견딜 수 없이 덥고 보리와 같이 굵은 이가 온몸 여기저기서 잔치를 하고 있었다. 

식사는 고작 삶은 밀 한 줌, 소금 한 술, 물 한 컵이었다. 배고파 견디기가 매우 힘들다. 집에서 아내가 차려주는 음식 배불리 먹고 시원한 냉수 마시고 서늘한 모기장 속에 누워 편히 자던 때가 그립기만 했다. 이용신 집사는 “좋은 환경에 있을 때 별로 감사한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게 다 죄야!” 하고 중얼거렸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견디다 못해 철야 기도드리며 두 가지 소원을 간구했다. 첫째는 맞지 않게 하시옵고, 둘째 무죄 석방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아침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 이제 기도의 응답으로 무죄 석방이 되나 보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나갔다. 그날 지역에서 이름난 큰 가옥 민구관댁으로 끌려갔다. 심문하는 곳이다. 거기서도 똑같은 심문을 당했다. 그리고 심문받은 조서 내용을 읽어보라고 한다. 

끝의 부분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인민을 일제에 팔아먹기 위해 교원을 했으며 반동분자를 양성하기 위해 종교교육을 했으며…’ 이렇게 기록했다. 이 목사가 “그런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더니 “이 새끼야 결과를 보면 원인을 안다. 결과가 그러니까 그런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냐?” 하고 발길로 차며 구타하는데 온몸이 불덩어리같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그날 밤 감옥에 돌아왔는데 곽 목사가 누워있다가 일어나면서 “그래 맞지는 않았어?”라고 묻는다. 그때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예수 믿는 놈들 꼴 좋다. 진작에 저주하고 죽어라!’ 이런 말이 튀어나오려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욥의 인내를 생각하라! 욥은 참음으로써 큰 축복을 받은 것 아니냐?’ 하는 음성이 들리자 마음속은 한없이 평화롭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도가 거꾸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사단이 틈을 타게 할 뻔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음력 8월 13일 추석 이틀 전 밤이었다. 열 시에 취침하여 얼마 동안 자고 있는데 갑자기 일어나라는 호령이 내렸다.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며 나오라고 하더니, 손을 뒤로 묶고 경찰서 마당에 줄지어 앉힌다. 선선한 바람도 있지만, 우리를 삥 둘러서서 총을 들고 에워싸고 있어서 견딜 수 없이 떨렸다. “주여, 떨리지 말게 하옵소서. 가늘고 길게 사는 것보다 짧고 굵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 이렇게 기도를 올리고 나니 떨리지 않고 평온한 심정이 되었다. 

“머리를 숙인 채로 들어라. 너희들은 항공기 공습 관계로 다리 건너까지 간다.” 그런데 그 말이 그의 귀에는 “너희를 무심천에서 죽인다.” 하는 말로 들린다. “누구든지 도주하거든 쏘라”하는 말이 들리며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