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교 주일을 맞이하여 브라질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복음의 사명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성도들이 계셔서
장성교회는 오늘도 행복하다

김환용 목사(충서지방 · 장성교회)
김환용 목사(충서지방 · 장성교회)

“목사님! 선교비가 없어유. 선교헌금 좀 해주셔유!”

2006년 7월 장성교회에 부임한 다음 주 선교부장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다. 시간이 흘러 사무총회 때 성도님들께 말씀드렸다.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면 합니다. 구역헌금 전액을 선교비로 전환했으면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

첫해 200만 원이던 선교비가, 2007년 9곳의 선교지, 800만 원의 결산을 보았다. 감사하게도 선교비가 더욱 증가하여 2010년에는 8개 구역이 각각 한 곳의 국내 선교지와 한 곳의 해외 선교지를 품에 안고 후원했으며, 2013년에는 방글라데시 박정훈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2020년에는 2,000만 원까지 선교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네 번의 섬김이 있었다. 첫 번째는, 2010년 A 선교회를 통하여 북한에 지하교회를 개척하였다. 두 번째는, 2014년 세미나 한 번 참석하기도 어려운 섬에 사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300만 원을 들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세 번째는, 2015년 어려운 형편에도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농촌교회 목사님 일가족 6명을 400만 원을 들여 3박 4일 중국 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네 번째는, 2020년도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보다 더 힘든 선교지들을 생각하며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사모님 가정을 포함하여 5곳에 각각 100만 원씩을 보내드렸다.

그래서, 선교합니다!

2002년 3월 신대원 졸업과 더불어 29세의 나이에 광시운산교회에 부임했다. 신대원 3년의 짧은 신학 공부와 교육전도사로 1년간 사역한 것이 전부였다. 10일간의 금식 기도와 더불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자 마음을 정했다.

4년 4개월의 시간 동안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들도 낳았다. 그 기간 목회도, 가정도, 재정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목회적으로는 전도사의 미숙함이 너무나 컸고, 가정적으로는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4년간 식물인간으로 계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재정적으로는 후원받은 선교비를 포함하여 100만 원이 안 되는 사례비로 일가족 네 명이 살아가기는 정말 어려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픔이 있다. 2003년 교회 봉고차가 오래되어 폐차되고, 아내는 임신 9개월의 만삭이었다.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데, 광시면까지 나가기 위해 택시를 부를 돈이 없었다. 산모는 운동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1시간을 걸어 나가 버스를 타고 산부인과에 갔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언제나 아내에게 미안하다.

2022년 우리 교회를 잘 아시는 어르신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성교회는 마게도냐 교회 같아. 교회는 아담하지만, 정말 사랑이 많고, 잘 섬기며, 선교하는 모습이 다시 봐도 마게도냐 교회야!!”

또한, 2022년 10월 담임 목회 사역 20주년을 맞이하여 성도님들께서 성지순례를 보내주셔서, 12일 일정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를 아내와 다녀왔다. 성지순례 보고로 가버나움에 ‘집 없는 예수(Homeless Jesus)’ 조각상과 표지판에 쓰여 있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는 말씀을 나누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성지순례 여정의 결론은 섬김입니다.”

금년 1월 셋째 주, 해외선교 주일을 맞이하여 한 성도 가정에서 후원하여 브라질 박지형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복음의 사명에 순종하시며, 헌신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셔서 장성교회는 오늘도 감사하며, 행복하다.

이제 담임목회 22년째로 접어들었다. 내 나이도 어느덧 20대에서 50대로 접어들었다. 앞으로 20년간의 목회와 그 이후 30년간의 인생을 더 살아가면서 변함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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