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성탄절, 그리고 새 길

Ⅰ. 도둑맞은 성탄절 - 크리스마스

불과 30년 전 즈음이었으리라. 나의 젊은 날의 12월은 ‘오직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의 분위기’로 충만한 계절이었다. 12월 1일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는 성탄 캐롤이 하루 종일 흘러 나왔고 학교에서는 크리마스 씰(christmas seal)을 판매하고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성탄 카드를 쓰게 했으며 교회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은 각각 성탄 행사를 위하여 매일 매일 교회를 찾으며 한해를 마감하고 주님을 고대하고 성탄의 기쁨을 간직하여 새해를 시작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시대상은 교회의 문화였다. 온 나라의 캐롤송, 성탄 새벽송, 성탄절 축하행사, 성탄트리,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은 가정과 이웃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고 모든 방송사들은 한해의 마지막 성탄절에서 송구영신 날까지 매일 기독교 영화를 앞다투어 특별 편성해서 모든 국민의 시각, 청각, 사고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주님을 기다리고 생각하게 하였던 다소 특별한 시대, 거룩한 계절이었다. 이 시대의 성탄절은 한 종교의 기념일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동행하는 국가적 절기였다.

기껏 시간의 흐름을 헤아려봐도 20~30년이 지난 2022년 오늘,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여전히 성탄을 기다린다.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 이웃들의 표현처럼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과연 이들의 마음에 있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한 해를 마감하는 축제와 누림의 복판에 설 또 다른 우리 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적 조류를 반영하여 성탄절이라는 단어 대신 즐겨 사용하는 영어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예배’(massa)의 합성어에 기원을 둔 말로 '그리스도 모임',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필요에 따라 세속화된 용어로 성탄절을 ‘크리스마스’라 대체해서 부른다 해도 이 성탄절의 주인공이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근자에 12월 25일이 성탄일이 아니라는 논리로 성탄절을 폄훼하고 교회를 공격하는 사례가 있기에 굳이 설명한다면 교회의 역사에 크리스마스가 왜 12월 25일로 지켰는지는 많은 전통과 이론들이 있다. 본디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성탄에 주목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집중하였다. 부활절의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고 그 의미를 기념하기 위한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성탄절의 의미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로마는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 12월 25을 중요한 절기로 지켰다. 그 이유는 12월 25일을 기점으로 밤보다는 낮이 길어지기에 어둠을 이기는 태양신의 발원을 기념하여 이 기간 약 10일 동안 노예들도 주인의 연회에 참여하고 가난한자들도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연령, 성별, 계급을 떠나 자유를 누리던 절기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지도자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기원설 : 로만 카톨릭 율리우스 주교가 기원이나 초대교회 스승인 히폴리투스가 기원이나 설 등이 있음). 한편 우리나라는 1949년 ‘기독 탄생일’이라는 제목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마치 기독교가 허구의 인물과 그 탄생일을 조작하여 무가치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경우가 있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탄절은 이 땅을 구속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다는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 다시 돌아와 오늘의 성탄의 의의를 생각해 보자.

 

Ⅱ. 새로운 시선 - 예수님의 ‘성탄’은 대중들의 잔치가 아닌 소박한 출발이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관습적으로 그려진 성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우며 신비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을 곰곰이 점검해 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참으로 민망하고 초라한 오심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복기해 볼 새로운 시선 첫 번째로 ‘예수님의 말구유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도심의 운송 수단인 말은 당시 고가의 가축이요 장교들이 사용하던 운송 수단이다. 예수님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할 때 적절치 않아 보인다. 두 번째로 ‘베들레헴은 아주 초라한 시골 마을이었다’ 베들레헴은 당시 3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고 예루살렘은 최대 3만명이 살고 있는 도시였다. 유월절을 비롯한 3대 절기가 되면 수십 만 명이 예루살렘을 찾아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동처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광야 등지에 천막을 치거나 목동들의 임시거처인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성경 누가복음 2장의 기록처럼 예수님의 탄생이 여관을 벗어나야 했고 밤에 밖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과 같은 동선에 있었으며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워있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아마 예수님과 부모님들은 광야의 자연 동굴과 같은 누추한 장소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이곳은 사람과 짐승이 같이 있기에 여물통 등이 사람이 주거하는 곳에 함께 있었을 것이고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고 있는 환경에 현실적인 개연성이 크다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는 확고하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초라한 자리에 소박하게 오시고 나그네 인생을 사셨다’ 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성탄 문화가 도둑맞은 것처럼 보여 백화점의 트리는 더욱 사이즈가 커지며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이에 반하여 교회의 트리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온 세상이 박수 갈채를 보내는 성탄의 모습이 아니어도 여전히 성탄의 고결함과 거룩함이 조금도 변하거나 축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Ⅲ. 새로운 발걸음 – 주님 걸어가신 길을 따라 새 길로 걷다.  

  근자에 “성탄절이 예년 같지 않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듣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절기를 온 세상 사람이 다같이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성탄은 성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비로소 온전하게 기다리며 기념하며 빛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차제에 어떤 세속의 관심을 받지 않고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기꺼이 오신 예수님을 우리 성결 가족과 교회들이 오롯이 기념하고 기뻐하고 빛나게 할 수 있는 성탄절의 문화가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찾아오심이 그저 축제나 행사를 위한 상투적인 오심이 아니라 더 거룩하고 더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방적 찾아오심이었고 더 나아가 이 사실을 깨닫고 영접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9~14)

결국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 의미를 말하라면 오직 성탄은 “일방적 선포인 하나님의 주도적 일하심이요 위대한 선물이라”는 사실에 오직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슨 또한 "무엇보다 성탄절은 일방적인 기쁜 소식과 위대한 선언의 절기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주목하거나 박수치지 않아도 여전히 성탄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세상의 조류가 예수님과 무관한 문화로 크리스마스를 그려간다 할지라도 성결 가족과 성결 교회는 가장 찬란하며 창의적 접근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길로 새 문화로 성탄의 의미를 다시 세워가는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초대 교부 오리겐은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탄생하셨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로 성탄의 의미를 정의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주님의 탄생이 주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기쁨이 올해도 여전히 우리 성결 가족의 마음과 교회에 가득차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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