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관계를 맺어 정부 청사에 설교하러 다닌 지 30년 넘습니다. 청렴하고 생산적인 공직자들을 대하면서 나라의 미래를 밝게 소망하게 된 점이 큰 소득입니다. 거기서 영적 결실도 많이 얻었고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첫 발령 받아 나온 젊은 공직자들은 참 맑고 생기 있습니다. 신앙도 순수하고 설교를 잘 알아들어서 더 좋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직 생활이 순조로워 과장, 국장, 실장, 차관, 장관까지 지내고 은퇴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부서의 기독 신우회 창립인이기도 합니다. 장관 퇴직 후에 신우회원들이 그분을 그리워합니다. 연말에 모시고 예배하고 식사도 나누면서 그리운 정을 달래자 했습니다. 실무자들을 세워 공무원식으로 그 모임을 기획합니다. 다들 좋아하지요. 그런데 그분이 제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목사님 청사 말고 밖에서 하면 안 될까요? 퇴직한 제가 청사에 다시 들어가는 건 좀 결례인 듯싶어서요. 밥은 제가 낼게요”

업무차 오는 것도 아니고 예배드리는 데 잠시 동참 했다가 식사하는 순서인데 정중하게 고사합니다. 신선한 충격입니다. 결국 밖에서 만나 아쉬움을 달래는 것으로 매듭짓지요. 지금도 더러 볼일이 있어도 청사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합니다. 

법조 인사들에게도 나름 인사 관행이 있더군요. 고시 차수를 기준으로 특정 기수가 조직의 총수 자리에 오르면 그 선배 기수들은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옷 갈아 있습니다. 후배 총수의 지휘에 행여 부담되지 않으려는 처신이랍니다. 조직이 젊어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관행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조직에도 그런 관행 같은 게 필요하다고 여겨요. 좀 젊어져야 새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저는 사람이 속일 수 없는 게 하나님, 양심,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이라고 혼자 성찰해 왔습니다. 세월을 많이 삭이고 보니 속일 수 없는 것 중에 시간, 나이도 포함되더군요. 지난 세월만큼 낡고 굳는 것은 창조 질서 아니겠어요? 

교회 공동체는 ‘증경’(曾經)이라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앞세워 지나간 세월을 붙들어 둡니다. 효용성 적은 ‘오래된 옳음’에 붙들려 있는 거지요. 이 말은 오래된 문헌, ‘숙종실록’에 잠깐 나온답니다. 그 두 글자를 함께 아울러 해석할 수 없음으로 증(曾)자와 경(經)자를 따로 풀이합니다. 증(曾)은 ‘일찍이, 전에’ 라는 뜻이고 경(經)은 ‘경력’에서처럼 ‘지내다’라는 뜻이랍니다. 꿰어맞추면 ‘전에 지낸’ 이라는 뜻입니다. 그 관록만 앞세워 모든 일에 전문가로 자처하고 의사 결정에 한몫하려는 모습이 우리의 오래된 관행입니다. ‘낄끼빠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이 혹시 있으실까요? 그런 구조 속에서 마땅히 빠져야 할 자리에 빠지지 못하니 끼어들어야 할 세대가 관여할 기회를 잃습니다. 실제로 매우 비생산적인 공동체로 전락 되는 증상입니다. 물론 공동체에 원로들이 소중한 자산임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 가치를 잘 보존하면서도 미래 지향적인 공동체 발전 방안을 강구해 보는 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폭넓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고요. 

짧은 제 견해 하나, 우리도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선출되면 그 선배 기수들은 자신들의 노화를 스스로 걸머지고 총회 사역의 현역에서 주어지는 모종의 직분들을 고사하면 더 생기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밝혀 보는 겁니다. 시행착오를 염려하겠지만 시행착오는 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 되지 않겠어요? 개교회에서도 시행착오 염려하느라 뒷짐 지고 지켜보고 있으면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활달한 현장 사역자들이 주눅 드는 거 정도는 미리 배워두어야겠습니다. 소외의 외로움도 미리 학습해야 할 과제이고요. 

30, 40대 대의원들이 선출되고, 그들이 교단의 항존직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 변화, 선배들을 답습만 하지 말고 세상과 만나는 접점의 정보들을 과감하게 수용할 가소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고 보니 64년이나 묵어 터진 저부터 물러설 자리 슬슬 살펴야겠군요. 이 논지가 나이 먹은 촌로의 넋두리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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