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긴급 체포

김광남 목사는 1940년 5월15일 전북 이리성결교회에서 동경 다가다(高田) 교회로 전임했다. 그는 김태일(金泰日)로 불리었는데 김광남으로 개명했다.

당시 34세의 젊은 목사로서 청운의 꿈을 품고 동양의 학술 중심지인 동경교회에 부임했다.

김 목사는 세계 제2차대전 막바지 그를 심문하는 일본 경시청 검사가 천황폐하에게 참배하라고 강요하자 “천황은 인간이다. 기독교는 예수에게만 예배드린다.”라고 단호히 거절하여 수난을 당했다. 

1942년 12월 8일에, 일본이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켰다. 일본군부는 식민지국 젊은이(특히 한국)를 강제로 끌어다가 총알받이와 위안부(정신대) 노무자 등으로 혹사했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세력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여 탄압했다. 

영국과 미국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 포고 방송으로 일본국민과 특히 기독교계에 근심을 안겨줬다. 그때가 중국과의 전쟁이 10년에 달하여 지쳐 있었는데 강대국 상대로 선전 포고를 했으니, 더 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희생된다는 걱정이었다.

일본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홍콩, 싱가폴, 마닐라 프랑스의 영토였던 인도네시아, 뉴기니, 솔로몬의 섬들 미얀마, 동인도까지 쉽게 점령했으나 일시적이었다. 

미드웨이섬에서 상륙작전하다가 일본 항공모함이 침몰 돼, 전쟁에 가장 유력한 비행기 손실로 패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부는 승리하고 있다고 국민을 속였고 더욱 허탄한 일은 일본기독교에 첩자가 있다고 유포했다. 국민은 그 유포를 사실로 믿었으며 군부와 헌병은 교회의 목사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일본군부가 동양평화를 말하지만 사실상 동양평화를 파괴한 장본이었다. 

“적국인 백인종의 우월성이라는 성서를 거역하는 사상 위에 서서 여러분의 나라와 토지의 수익성을 빼앗고 입으로는 인도와 평화를 말하면서 우리를 인종차별 아래 두어, 동아 여러 민족을 향해 왕같이 군림하려고, 피부색 차이가 인간 자체의 차이처럼 망상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동양인들을 자기의 안일과 향락을 위해 노예화하며 마침내 동아를 자기 나라의 연장으로 이끌려고 획책하고 있다.” 거짓 선동으로 전쟁 명분 합리화를 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동양을 처참하게 파괴한 세기적 전쟁범죄 행위였다. 

당시 일본은 국체명징(國體明徵)을 표방하고 우리에게 황민(皇民)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이 시기에 일본 수도 동경 다가다 교회에 김 목사는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소속 교단인 재일 한국성결교회는 일본당국에 의해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김 목사는 한국성결교회 본부의 결정으로 재일한국 성결교회에서 전임된 여러 전도사의 인사 주임이고, 정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정교사는 일본당국이 정해준 목사의 호칭이었으며 한국성결교회와는 행정상 분리되었다. 그가 부임한 동경 다가다(高田) 교회는 동경 서북에 자리한 침례교회의 건물이었다. 목사관과 비품도 완비되어 있었고 강단 아래 세례통(침례시설)이 설비된 아담한 교회당이었다. 

일본의 교회에 박해가 더해 갔다. 강단에서 우리말은 엄금되고 예배 때마다 일본어를 강요하여 강단에 설 때마다 매우 괴로웠다. 전시대학생 제복에 삭발한 전시학생 노릇을 하며 주일에만 목사 노릇을 했다.

골고다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졸고 있던 베드로를 연상하며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는 심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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