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고통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저들의 고통을 알면서도 무관심과 이기적인 마음, 회의와 절망의 마음을 가졌던  한국 교회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지난 6월 19일 우리 교단의 통일 주일을 맞아 교회별로 드린 공동 기도는 감동적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우리의 잘못으로 받아들여 그 회개 위에서 새로운 땅을 만들고자 하는 염원은 높고 아름답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1년 전 마오쩌둥이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부를 수립한 야욕을 김일성이 흉내 낸 것 외에는 어떤 당위도 찾을 수 없는 전쟁이다. 

당시 고향의 모내기를 위해 전국적으로 주말 휴가에 들어갔던 한국군도 그렇고, 2차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다가 느닷없이 소집된 미군들에게도 훈련과 리더십이 크게 부족했다. 여기에 미국과 한국에 몇 가지 실수가 있었다. 

미국 측은 6개월 전(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애치슨 라인)에 한국과 타이완·인도차이나 반도가 빠짐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거기에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중국군의 개입을 걱정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맥아더는 중국이 참전할 리 없으며 혹 참전한다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를 겪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승리한 그였기에 워싱턴에서는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세계전쟁사에 빛나는 이 작전의 승리로 그는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신적인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연합군이 평양에 입성한 직후 중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더 이상의 북진을 꺼렸으나, 맥아더의 북진을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 맥아더는 한국을 잘 몰랐다. 전쟁이 펼쳐지는 동안 하룻밤도 한국에서 보내지 않고 전세기를 타고 도쿄로 갔던 사령관은 여름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들에게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지형은 더욱 험악해지는 한국의 사정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몰랐다. 

그는 미군을 중국 접경지역으로 보내지 말라는 미 합동참모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중국 국경인 압록강까지 북진을 명령했다. 이미 중공군은 한반도에 배치돼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격해 보급선이 길게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한국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실천용이라기보다는 북진에 환호하는 국민들을 향한 여론전으로 사용한 측면이 강하다.

그가 북진을 감행한다면 세계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미군정은 군사고문단만을 남겨놓고 남한에서 퇴각할 당시 소수의 재래식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갖고 철수함으로써 북한이 오판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그 후 이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고집함으로써 정전협정 당시 한국이 협정당사자로 참여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다.

1982년 9월부터 시작한 동독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기도회가 사회주의 몰락기에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극을 예방했으며, 1989년 10월 9일 70,000명의 시위대가 교회당 밖에 운집한 가운데 펼쳐진 촛불 기도회는 다음 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변혁은 그렇게 낮은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법이다.

영국은 피식민지 국민을 비열하게 만들고 편을 갈라 서로 더 비열해지도록 싸우게 만드는 기술로 그들은 여러 나라를 지배했다. 

이런 저열한 수법을 돌파한 사람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무엇으로도 당해낼 수 없는 무도한 통치를 무저항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극복해냈다. 잘못한 것은 없으나 힘이 없어 수렁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해답을 제시한 위대하고 찬란한 운동, 무저항. 그것은 평화 기도를 닮은 방식이다. 하늘을 움직이는 방식은, 세계인들은 감동하게 방식은 그런 것이다. 통일 기도회가 그치지 않고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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