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빛교회, 미주총회장

정승일 목사가 사명을 지니고 뉴욕에 도착한 때는 12월 초순이었다. 뉴욕의 성결교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뉴욕에 사는 성결교회 신자들의 간청에 따라 브라질에서 목회하던 김석규 목사가 OMS의 초청으로 미국에 와서 그해 4월에 18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신자들이 계속 늘자 그해 8월 8일 뉴욕한빛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창립예배를 드렸으나 12월 17일 김석규 목사는 샌프란시스코의 상항성결교회의 청빙을 받아 떠났고, 12월 19일 주일에 정승일 목사가 부임하여 평소 그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명 설교에 은혜 받은 성도들이 계속 늘어 1년 후 11월에 뉴욕주정부의 인가와 12월엔 연방정부 비영리 단체 인가를 받았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교회가 더욱 부흥되어 1981년에는 미국교회당 임대를 해지하고 큰 성전을 구입하여 교회가 질적·양적으로 부흥하였다. 1980년 미주성결교회 제1회 총회가 나성교회에서 열려 총회장에 안수훈 목사, 부총회장에 정승일 목사가 선임 되었다.

정 목사는 한국에서 총회장 역임해 반대했으나 한국에서의 총회장 경험이 새로 발족하는 미주총회에 도움 된다며 전형위원회에서 발표, 결의되었다. 그는 이듬해 3월 나성교회에서 개최하는 제2회 미주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50여 개의 교회가 캐나다, 미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한국에서의 행정 경험으로 잘 치리하여 한국과 미주 총회장을 한 유일한 총회장이 되었다.  

1991년에 그가 평생 기도했던 북한 방문의 길이 열리자, 그는 부모님의 생사확인을 위해 북한 출신 동료 목사 몇 명과 함께 미국 당국의 허락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47년 만의 방문이었으나 불과 2년 전 부친이, 4년 전 모친의 소천으로 묘소를 방문해 기도로 슬픔을 달랬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지 17년 동안 은혜로운 말씀과 사랑어린 화해와 인격적인 목회로 이민자들의 외로움을 잘 보살펴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마침내 1993년 4월에 그는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한국 목회 26년, 미국 목회 17년 모두 43년의 긴 목회여정을 잘 마쳤다.

그의 가족은 2남 5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다. 장남(대일)은 한빛교회 장로로, 차남(대선)은 미국의 감리교회 목사로 헌신하였으며, 딸 5형제도 믿음의 가정으로 결혼하여 후손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모범적인 신앙가문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은퇴 후 두 딸이 살고 있는 서부 오레곤주로 오시기를 간청하여 동부 뉴욕을 떠나 서부 태평양 접경인 오레곤 주로 노후의 장막을 옮겼다. 그리고 초교파 오레곤 주의 원로 목사들과 교제하면서 때로는 교회 초청으로 설교도 하고, 걷기운동으로 체력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곳에 온지 3년 후에 사랑하는 아내(이현숙 사모)가 암으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혼자 살 수가 없어 딸들의 중매로 성결교회 순교자 김동훈 전도사 딸인 김혜경 사모와 재혼했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막내딸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는 아픔을 또 겪어야만 했다.

그는 90세를 넘기며 몸은 건강했으나 조국을 그리워하며 지내자 마침 큰 딸 가족이 한국에 가서 살게 되어 충북 제천의 산기슭에 멋 있는 집을 지어 살면서 한국을 그리는 아버지께 노후를 잘 모시겠다고 해서 2016년에 부부가 한국에서의 노후생활을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  

이 소식에 월 1회 손녀딸의 승용차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가끔 설교도 했다. 15분 설교가 짧고 깔끔하고 은혜로운 설교였다. 2018년 11월 3일 향년 96세로 아름다운 사명의 삶을 마치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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