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16년차 총회 개회예배 설교

 설교자: 총회장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말씀이 사람 삶의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며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초대교회로, 성경으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1~7)

지형은 총회장이 제116년차 총회 개회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다.
지형은 총회장이 제116년차 총회 개회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방식과 태도를 표현하는 신약성경의 단어가 있습니다. 명사 ‘디아코니아(Diakonia)’, 동사 디아코네인(diakonein)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일반 헬라 세계에서 노예와 관련된 표현이었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든다는 뜻입니다. 단어가 노예와 연관됐으니 사람들이 이 단어를 들을 때 당연히 긍정적인 인상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굴종, 비굴, 예속, 살아있는 물건, 비천함 등을 떠올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27절 본문을 보십시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에 섬긴다는 헬라어 디아코니아가 세 번 나옵니다. 사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는 제자들의 불신앙과 이런저런 허물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과 삶으로 가르치시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날의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은 또 싸웁니다. 누가 크냐는 서열 다툼입니다.

예수님은 충격 요법을 사용하십니다. 노예와 연관된 일반 언어의 표현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 언어로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고민하며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무지하고 더디 깨닫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겸손과 희생과 헌신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선택하신 방법이 노예와 연관되는 단어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 태도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위의 누가복음 본문에서 27절이 아주 명백하게 디아코니아의 당시 일반 어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서 먹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조적으로 사용하시며 질문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자’로 번역된 표현은 직역하면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서 먹는다는 말입니다.

로마 시대에 제대로 차려서 먹을 때는 노예가 식사 시중을 들었고 주인이나 손님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 것이 식사 문화였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금방 식사 장면을 떠올리는 말이었습니다.

‘주인이 크냐, 노예가 크냐’는 질문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노예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한 십여 년 전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교계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면서 기독교 신앙에 먹칠을 하고 있을 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발제자 한 분이 교계의 조직에서 호칭을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총회장을 ‘총회종’으로, 노회장이나 지방회장을 ‘노회종’과 ‘지방회종’으로 말입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 언어유희에 탁월한 분이 제안한 기발한 발상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인 조직신학자 김명용 박사님이 발제한 내용입니다.

토론회에서 이 얘기를 듣고서 고신 교단의 신학자 이성구 목사님이 “내가 몇 년 전부터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발상에 깊이 공감합니다.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순우리말로 섬김 한자어로는 봉사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아주 뚜렷한 섬김의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사도행전 6장 1~7절에 두 가지의 디아코니아가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상황을 잠깐 살펴봅시다. 구제 재정을 편파적으로 지출해서 예루살렘 교회 내부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소수파인 헬라파가 다수파인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사도들이 문제를 살피며 원인을 진단하고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하나는 갈등의 현상적인 해결입니다. 구제 재정을 공정하게 집행할 사람들을 뽑아서 이 일을 맡깁니다. 더 중요한 것이 갈등의 근원적인 해결입니다.

사도들은 말씀 사역의 약화가 문제의 뿌리라고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예루살렘 교회에 말씀 사역 곧 말씀이 삶이 되는 일이 옆으로 밀려났습니다. 교세가 늘면서 다른 일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이것을 깨닫고 다시금 말씀 사역을 교회의 중심에 놓습니다.

2절과 4절에 이런 해결이 뚜렷합니다. 먼저 2절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섬기는 일을 제쳐 놓고 식탁의 일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하나님 말씀의 섬김’ 곧 로고스의 디아코니아와 식탁의 섬김 곧 트라페조의 디아코니아가 뚜렷이 대조돼 있습니다.

이제 4절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개역개정판에 ‘말씀 사역’으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은 정확하게 ‘로고스의 디아코니아’, 곧 말씀의 섬김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역은 근본적으로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며 그 내용은 크게 둘, 말씀의 섬김과 식탁의 섬김입니다.

식탁의 섬김은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사역 이외의 모든 일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통상적으로 남녀전도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선교와 봉사’ 또는 ‘전도와 봉사’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도 말씀의 섬김과 식탁의 섬김 두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계명을 둘로 요약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명(殉命)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세상을 섬기는 이웃 사랑이 작동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세의 비밀 병기로 세우신 교회의 중심 사역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삶이 되는 거룩한 흐름이 ‘말씀삶운동’이요 그 구체적인 방법이 말씀묵상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섬김을 중심에 두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의 정점을 맞이합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이 그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란 번역의 ‘왕성하다’는 헬라어가 ‘아욱사노’(auxano)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면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땅에 심긴 씨앗이 그 안의 생명력으로 움트고 자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씨앗의 생명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살아 움직입니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도록 작동하면서 일합니다. 그런 현상이 ‘아욱사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66권 성경 말씀이 거룩한 씨앗입니다.

이 말씀이 사람 삶의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며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가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하는 것은 언제나 성경 말씀이 옆으로 밀려날 때였습니다. 갱신과 회복과 부흥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 말씀이 다시금 살아 움직이면서 가능했습니다.

지형은 총회장
지형은 총회장

16세기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이 그러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입니다. 우리 교단도 그렇습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코로나19 이전으로 회복되자고들 하는데,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25년 동안 이미 교세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고, 말씀에서 벗어난 행태는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많았습니다.

초대교회로, 성경으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우리 성결교회에서 이 운동이 강하게 솟구치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