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성역 40년 부천 원종동 농촌마을 외양간에 교회 개척
핵 환자가 목회 첫 열매
힘겨웠던 출산 과정서도 하나님 은혜와 사랑 체험

 

원종제일교회 이원영 목사에 40년 목회 여정이 활천문학회의 수기에 잘 드러났다. 사진은 원종제일교회 개척시절부터 최근까지의 목회활동 사진.
원종제일교회 이원영 목사에 40년 목회 여정이 활천문학회의 수기에 잘 드러났다. 사진은 원종제일교회 개척시절부터 최근까지의 목회활동 사진.

나의 목회 40년 동안 덮어 두었던 아픈 흔적들을 이제는 은혜 아니면 고백할 수 없는 결 고운 열매의 추억으로 꺼내 보려 한다.

1983년 2월에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5일 후 결혼 예배를 드렸다. 부천 원종동에 신혼 살림살이를 싣고 땅거미 지는 저녁에 첫 목회의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맞아주는 사람 없고 아는 사람 없는 농촌 마을이다. 장화가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낯선 이방인의 걸음에 개 짖는 소리만 온 동네에 퍼져나갔다.   우리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주님이 주신 목양지라는 생각에 질퍽한 땅에 입이 닿도록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지역의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주님께서 평안을 주셨다. 두려움과 어두움이 거룩한 빛에 의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외양간으로 사용하던 헛간을 보증금 30만원, 월 3만원에 계약을 했다.

오물은 물을 뿌려 씻어내고, 소고삐 매였던 기둥은 하얗게 페인트를 칠하고 고물상에 가서 중고 합판을 사 오고, 동기 전도사님이 톱과 대패를 가지고 오셔서 멋지게 강대상을 만들어 놓았다. 아내는 들녘에 다니면서 야생화를 꺾어다가 강단 꽃꽂이를 장식하니 멋진 예배당이 되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서생원이 강대상 앞에 지도를 그려놓고, 개구리들이 모여 회의를 하다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혹시 성도들의 눈에 띌까? 쥐똥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넣고 예배를 드렸다. 깨진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은혜의 빗소리와 함께 찬양을 불렀고, 맑은 날 강하게 들어온 빛은 치료의 광선이라 여기며 주님과 동행했다.

성전 바닥에 누우면 보이는 수많은 별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흥의 복을 주실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아내가 교회학교 교사로 다년간 섬겼기에 몇 달 만에 어린이들 6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이렇게 보내 주시니 신이 났다. 어느 날 축호 전도를 하고 돌아온 아내가 웃으면서 심방을 준비하라고 했다.

아내의 인도로 그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악취가 진동한다. 40대 여인이 한여름에 솜이불을 덮고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들락거리는 그것, 숭숭 뚫린 치아 틈에는 이물질이 끼어있다.

원종길 목사
원종길 목사

옆집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결핵에 걸려서 이제 돌아보는 사람도 없고, 혹시나 죽지 않았는지 동네 사람들이 가끔 들여다보고 간다고 했다. 아내는 먼저 부엌에 가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머리를 감겼다. 또 사택에 달려가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사준 이불을 갖다 주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이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의 고름을 빨아내며 살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는데, 이곳 원종동에서도 이렇게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사역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 버림받고 죽어가는 결핵 환자를 불쌍히 여기사 영혼과 육체의 강건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다음 주일 예배에 죽어가던 그 여인이 나타났다. 비닐봉지에 한 움큼의 성미를 움켜 쥐고 … 그렇게 그녀는 첫 목회의 전도로 거둔 첫 열매가 되었다.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이 춤추며 내리던 1983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 교회 철탑 위의 십자가 불빛은 가난한 시골 마을 원종동에도 아기 예수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상가 3층의 20평에 전세로 들어가 15평을 예배실로 꾸몄다. 나머지 5평은 합판으로 칸을 막아 사용하는 사택이지만, 내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아기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며 즐겁게 찬양한다. 예정일보다 빨리 진통이 오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갈 돈도 없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기에 아내는 비장한 결심을 한다. “여보! 저 병원에 안가고 집에서 우리 아기 낳을 거예요.”라며 진통을 참으며 소독된 가위와 실을 준비하고, 해산에 필요한 온갖 물품을 챙긴다.

그런 아내만 지켜보고만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태 안에 있는 아기에게 미안하고 아내의 얼굴은 도저히 쳐다볼 수 없었다.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다. 앞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아내의 이마엔 구슬땀이 흐르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듯 다섯 평 사택으로 몸을 숨겼다.

부축하여 큰길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산부인과로 직행하여 분만대 위에 눕게 되었다. 얼마나 다급하던지 전도사는 화장실에 들어가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내가 건강하게 순산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짧지만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분만실 옆에서 서성거렸다. 잠시 후 분만실에서 힘찬 생명의 고귀한 첫울음이 터져 나오고 의사가 나오면서 지나가는 소리로 “왕자님입니다.” 뒤따라 나오는 간호사가 아기 아빠를 찾는다.

“제가 아기 아빠입니다. 왜 그러시죠?”
“혹시 가족 중에 유전적인 질병이 있으신가요?”

나는 순간 ‘아!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나는 반문했다.

“아기가 정상이 아닌가 보군요?”
“아뇨, 그 정도면 심각하지 않아요. 수술하면 되니까…”

선천성 구순구개열. ‘나의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다니’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 들어 머릿속이 노랗다. 의사는 이대로는 아기를 데려다가 키울 수 없다고 했지만, 택시를 잡아타고 하얀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성탄절 늦은 밤에 우리 부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야 연탄불이 지펴 있는가! 아니면 전기장판이라도 깔려있는가!   아내가 덩그러니 누워 훌쩍훌쩍 울고, 아가도 추워서 그런지 배가 고파 그런지 자꾸만 울어 댄다. 젖을 빨 수 있는 입술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사의 그 한마디가 갑자기 뇌리에 스쳐 간다.

“이대로 퇴원하면 아이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아이는 울고 엄동설한 수도꼭지는 얼어 터지고 천장에서는 새로 지은 상가의 결로 현상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 산모의 얼굴과 이불을 침범하고 있다. 창틈으로 울부짖는 칼바람 소리는 우리 세 식구를 한 몸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옷을 풀어 앙가슴에 아기를 품고 나는 아내를 감쌌다.  

사랑의 세 겹줄 체온에 하늘이 얼굴을 돌렸는가! 그날 밤은 아가도 산모도 별 탈 없이 긴장감과 눈물로 꼬박 새웠다. 성탄절에 태어났으니 고민할 것 없이 이름을 성탄이라고 지었다.

입술과 잇몸이 없으니 수유가 되지 않아 콧줄을 통하여 주사기로 분유를 공급하는 방법을 병원에서 습득해 왔어야 했는데 무작정 퇴원한 우리는 참 난감했다. 성령님께서 아내에게 지혜를 주셨다.

배고파 우는 성탄이를 어쩔 줄 몰라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이던 아내가 벌떡 일어났다. 물을 펄펄 끓여 도루코 면도날을 소독하더니 분유 병 젖꼭지 끝을 예리하게 열십자로 베었다.

분유 병뚜껑을 닫고 거꾸로 들어보니 분유가 흘러내리지 않고 똑똑 떨어진다. 젖꼭지를 최대한 깊숙이 넣어주니 아기가 잘근잘근 눌러 꿀꺽꿀꺽 잘도 삼킨다.

“할렐루야!” 아들 성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벙긋벙긋 웃는 모습이 참 대견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먹고 입고 잤다. 하나님은 예비하신 손길들을 통하여 절묘하고 적절하게 역사하셔서 여섯 번의 수술을 하게 하셨다.

대학을 졸업한 성탄은 지도교수의 사무실 근무를 시작으로 국내외 굵직한 기업 근무를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탄이를 통하여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나의 어설픈 목회가 40년이 되었으니 성탄이의 나이테도 40줄이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성결’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값을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심야 기도회에 서너 명의 성도와 함께 목이 터지도록 기도하며 설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감동되어 응답받고 목회를 결정하게 되었단다.

아버지의 서울신학대학교 동문이 되고 후배가 되고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내년에 성역   40년 은퇴를 앞두고 은혜로운 은퇴를 준비 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하여 공기 좋은 김포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아내와 손잡고 청송로 오솔길를 지나 걸포천 산책로를 걷는다. 쏟아지는 빛줄기를 타고 주님의 음성이 우리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자여!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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