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영국 유학 시절, 학교에서 책과 씨름하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허기진 배로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곤 했다. 짙은 어둠 속에 현관 입구에 밝힌 아내의 불빛을 보면 된장찌개를 먹을 기대로, 쫑알거리는 아이들을 안아줄 요량으로 안도감과 기쁨으로 돌진하듯, 집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집은 네 개의 벽이 아니라 내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러나 그때의 그 기억과 그 심장은 분주한 일상 속에 둔감해져간다. 

가정, 가깝고 소외된 신앙의 장소
일상의 어떤 공간들은 너무나 친숙하기에 그것의 소중함이 종종 망각된다. 가정이 그렇다. 가정은 종종 신앙의 영역에서도, 설교에서도 망각되기 쉬운 공간이다.

신앙생활이란 오직 교회 생활과 세상 생활만이 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몸과 마음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 가정이다.  

따라서, 가정은 중요한 신앙의 공간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며 그 분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실상 가정에서의 우리의 삶과 행동은 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여성 설교학자, 악트마이어(E. Achtemeier)는 신앙과 가정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성서의 하나님께서는 개인으로서의 우리와 교제하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즉 결혼 공동체에 속한 부부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의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 성서적 신앙에서 모든 가족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가정생활의 모든 영역과의 관계에서 활동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섬세하게, 보다 다층적으로 가정에 관한 설교를 기획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급변하는 시대 속에 흔들리는 가정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 네 가족을 소개합니다  
5월 가정의 달, 설교는 쉬운 듯 어렵다. 주제가 정해져 있다는 면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쉽지만, 그 내용이 고정되어 식상해지기 쉽다는 면에서는 어렵다.

이 시기  많은 강단에서 아마 가장 많이 설교의 본문으로 삼는 구절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에베소서 5장 1~4절 본문일 것이다. 그리고 종종 그러한 본문은 부모께 순종할 때 누리는 장수의 복에 관한 본문으로 이어지곤 한다(출 20:12). 

그러나 가정의 달 설교에 관해 굳이 이러한 본문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시선을 달리한다면 가정에 대한 진리의 꽃들로 가득한 천상의 화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 중 대표적인 책은 창세기일 것이다.

창세기는 온통 가족과 가정 이야기로 가득하다. 게다가 한 가족 이야기도 아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네 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다. 그곳에는 한 가문의 믿음과 불신앙, 사랑과 질투, 분쟁과 화해 등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신앙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축복과 형제간의 화해, 믿음의 가정의 실패와 승리, 선대(先代)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설교의 거인들은 종종 이들 가문과 가정의 천로역정(天路歷程) 이야기 속에서 현대 가정을 위한 진리의 생수를 길어내곤 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본문이 좋은 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이야기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귀납적 형식이라 저항감이 없으며 공감하기 쉬우며 인격적이며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설교의 좋은 친구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일상, 은총의 순간들
급변하는 시대 속에 강단이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그 공간 속에서의 일상성의 행복이다. 목회 때 만났던 한 교인을 기억한다. 그 가정에 심방을 갈 때면 문제가 가득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간절한 중보기도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어김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새로운 기도제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간과되는 것은 일상의 은총이었다. 대개 소중한 것이 그러하듯, 그것은 햇볕처럼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설교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며 은총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하다면 설교는 가족들과 먹고 마시고 떠들고 사랑하고 때때로 투정하는 모든 순간이 은총이요, 은혜임을 일깨워야 한다. 

시편 128편은 이러한 평범한 일상의 삶들이 주님의 축복임을 강조하며, 이렇게 노래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 128:3~4).

축복과 성공만이 가정의 영광된 순간이 아니라 이 공간 안에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전능자의 기적이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지 않으면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을 배신하는 어리석은 일이 발생한다.

얼마 전 소천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이어령 선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를 그리워하며 극한의 회한과 참회 속에 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가정의 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소중한 진리를 담고 있다.

늦은 밤 책을 보던 그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 문을 두드리며 “아빠, 굿나잇!” 하고 인사하던 어린 딸에게,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냥 손만 흔들었던 지난 날을 참회하며 늙은 아비는 이렇게 썼다.  

“만일 지금 나에게 그 삼십 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그래 민아야,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 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너는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거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 하고 외치는 거다. 약속한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치켜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 자라 민아야.”

특히 이러한 일상의 은혜가 적용되어야 할 공간은 부부관계이다. 여기에서 부부를 언급하는 이유는 어린이 주일, 어버일 주일, 스승의 주일로 지키는 5월 교회 행사의 특성상 종종 부부의 자리가 설교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부야말로 아이의 부모요, 어버이를 섬기는 가정의 기둥이요, 핵심 축이다. 일상성의 은혜는 이들 부부의 삶에도 일깨워져야 한다. 

C. S. 루이스는 부부간의 사랑의 감정에 대해 통찰력 있는 조언을 준다.

“항상 짜릿해야 한다고 정해 놓고 그 상태를 인위적으로 연장하려 하면, 그만큼 그것은 점점 더 약해지고 뜸해진다. 결국 당신은 남은 평생 권태와 환멸에 빠진 노인이 되고 만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잃어버린 청춘 타령이나 하는 중년 남녀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루이스의 조언은 실제적이다. “짜릿함이 식어서 점점 사라져도 괜찮다. 그 죽음의 시기를 통과해 이후의 더 잔잔한 흥취와 행복 속으로 들어가라.” 

이러한 일상의 사랑을 성령과 연관시켜 말한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이다. 설교에서 누구보다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강조했던 로이드 존스는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성령 충만의 표징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황홀경에 빠지거나 비범한 현상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집에 있을 때 아내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천상의 낙원
코로나로 인해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다같이 지나왔다. 창세기의 가족들 이야기가 그러하듯, 희노애락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우리의 설교는 완벽한 가정이 아니라 가정의 일상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옛 찬송시인은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가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우리의 아이들은 저만큼 커가고 당신과 나는 어느 틈에 이만큼 살아왔다. 함께 하는 은총의 하루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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