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모님께서 소천하셨다. 생전에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것 때문에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아내에게 그래도 장모님은 예수님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다 가셨다고 위로했다.

장모님은 일찍 신앙생활을 하셨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힘을 얻으셨다.

장모님의 삶 구석구석 믿음의 증거들이 있었고, 아름다운 간증들은 당신과 자녀들을 진정한 신앙인으로 성장시켰다.

하여, 장모님의 마지막 길은 천국 소망으로 가득했다. 장모님의 가시는 길을 보며 작고하신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나의 어머니!’ 순간, 탄식이 쏟아졌다.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누워 계시던 어머니의 가는 어깨가 시야를 가득 채우며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가는 어깨를 한 번도 안아 드리지 못했다. 어머니의 고통의 세월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어깨를 안고 위로해 드리지 못했다.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와 가슴이 뻐근했다.

어머니의 세월은 참으로 잔혹했다. 어머니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 경찰이었던 큰아들을 잃었다.

인민군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 형님의 주검을 마주 하고도 마음껏 울지 못했다. 쏟아지는 통곡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했다.

장남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형님의 죽음은 서곡에 불과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과 국군은 전세를 역전해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잃은 한을 푸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속절없이 후퇴하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형님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키겠다며 입대한 둘째 아들을 잃었다.

어머니는 불과 몇 달 만에 생때같은 자식을 둘이나 잃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전쟁 후에는 둘째 딸을 잃었다. 두 아들을 잃고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시집을 보낸 것이 잘못이었을까?

둘째 누나는 첫 출산 이후로 시름시름 앓았다. 결국 집으로 와서 어머니가 병간호를 하였는데 어려운 시절이라 약도 주사도 구하기 어려웠다.

천신만고 끝에 약을 구했지만 너무도 깊어진 병세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제가 나으면 돈 벌어서 약값으로 지신 빚 모두 다 갚을께요.’ 라는 누나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누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둘째 누나를 보내며 아버지, 순양이 누나, 병호 형 그리고 나 온 가족이 가슴을 치며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같이 울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담담해 보이셨다.

엄마 잃고 서러워 우는 어린 손녀를 안고, 아이가 놀랠까 통곡조차 참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의 어깨가 그리도 떨렸던 것이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이 아니라 슬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그 아픈 마음을 어찌 감히 안다 할까? 그저 미련한 머리로 갈기갈기 찢기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으리라 짐작해 볼 뿐이다.

그 아픈 세월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고통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신 어머니! 그저 당신 혼자 가슴에 끌어안고 견뎌내신 어머니! 그저 어머니가 안쓰럽고 가엾고, 무심하고 어리석은 불효자라 죄송할 뿐이다.

왜 어머니의 가는 어깨를 안아 드리지 못했을까? 왜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아 드리지 못했을까? 왜 통한의 세월을 말로라도 쏟고 풀어버리시게 그 말씀에 귀 기울여드리지 못했을까?  

너무나도 어리석고, 무지하고, 어설프고, 못난 자식이다. 허나, 못난 자식 타박하지 않으시고 고맙다 하시며 떠나신 어머니! 지금은 하늘나라 주님 옆에서 이 세상 삶의 여정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을 모두 잊고 평안히 계시리라.

이 세상에서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불효자의 슬픔과 회한과 참회를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천국의 소망을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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